고급 기술자 1명만 있어도 수십년 걸릴 기술 단숨에 배워
256MD램 개발 주역 중 1명 대만서 컨설팅 사업 '충격'
이직 막을 방법 없어 '초비상'
2~3년 걸리는 소송 무의미…삼성, 퇴임 임원 최소화
[ 남윤선/김현석/정지은 기자 ] 반도체 전문가들은 “반도체산업 경쟁력은 90% 이상 핵심 인재가 좌우한다”고 말한다. 같은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만드는 과정이 모두 다르고, 각 기업 고유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이 수십억원을 들여서라도 한국 반도체 업체의 핵심 인재들을 데려가려는 것도 한국 업체가 가진 노하우를 한 번에 습득하기 위해서다. 홍성주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부사장)은 “반도체산업에선 인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그런데도 반도체 전공 교수와 학생은 줄어드는데 인력 유출 문제까지 있어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레시피’ 유출되면 큰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D램,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반도체를 생산한다. 보통 같은 제품이면 만드는 공정도 비슷하다. 스마트폰은 삼성 제품이든 LG 제품이든 부품이나 공정이 큰 차이가 없다. 반도체는 다르다. 같은 D램이라도 각 회사가 쓰는 화학물질이 다르다. 장비를 어떤 순서로 어떻게 배치하느냐도 다르다. 한국 기업들은 20년 넘게 메모리반도체에 주력하면서 나름대로 노하우를 개발해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를 요리에 빗대 ‘레시피(조리법)’라고 표현한다. 한 업계 전문가는 “같은 김치찌개를 끓여도 요리사마다 레시피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라며 “반도체 전체 공정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신생업체로서는 수십 년의 노하우를 한 번에 배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과거 중국이 디스플레이산업 육성을 시작할 때 국내 인력을 전략적으로 영입했던 것과 비슷하다. 중국은 2003년 초 어려움에 처한 국내 LCD(액정표시장치)업체 하이디스의 인재를 대거 흡수해 세계 5위의 BOE를 육성해 냈다.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서 부사장급으로 일했던 C씨가 대만에서 반도체 컨설팅업체를 설립한 것을 업계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그는 1984년 삼성에 입사해 황창규 현 KT 회장(전 삼성전자 사장)과 함께 한국 메모리반도체를 세계 1위로 올려놓은 제품인 256MD램을 개발한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01년 당시 하이닉스반도체로 이직해 적자였던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졌다. 물론 C씨가 반도체업계를 떠난 2010년은 40나노 D램을 개발하던 때로, 현재 20나노 기술과는 격차가 크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는 “지금의 기술도 20년 전 처음 제조를 시작했던 기술을 꾸준히 개선시키며 이뤄낸 것”이라며 “C씨 같은 사람이 있으면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초기 진입장벽을 쉽게 넘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력 유출 막을 방법 없어
업계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임원을 모아 인재 유출에 대한 긴급 간담회를 열었다. 하지만 뚜렷한 해법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업체들이 현재 연봉의 3~9배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기 때문이다.
‘동종업계 이직금지’ 조항도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중국 반도체 업체들은 한국 인재를 직접 스카우트하지 않고, 계열사에 취직시키는 방법을 쓰고 있다. 투자회사 등 명목상 반도체와 전혀 상관없는 기업에 취업해 반도체 관련 업무를 하는 식이다. 이론상 법적 소송이 가능하지만, 중국 내에서 소송을 해봐야 승산이 희박하다. 재판이 끝나는 2~3년 뒤면 이미 노하우가 다 전수된 뒤여서 소송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업체들도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는 올해 전체 임원 100여명 중 10명 정도에게만 퇴임 통보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사업부가 20% 이상 임원을 내보낸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퇴임한 인재가 중국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했다는 후문이다.
남윤선/김현석/정지은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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