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저격' 기치 내 건 신예능, 먹방 위협하다

입력 2015-12-05 05:06  

미디어 & 콘텐츠

엔진소리만으로 버스 차종 맞히고…치킨 보면 브랜드 이름 '척척'

MBC '능력자들'
'덕후'는 학위 없는 전문가, 마니아 뛰어넘는 '신지식인'
비행기 날개만으로 기종 파악, 소리만으로 새 정체 알아내
한 가지를 깊고도 뜨겁게 사랑하는 덕후의 삶, 시청자들에게 감동 줘



[ 유재혁 기자 ]
막걸리 맛은 지역마다 다르다. 서울과 경북, 제주와 전북 등 지역 특유의 향과 색이 제각각이다. 잣 유자 포도 등 재료에 따라서도 다른 맛을 낸다. ‘막걸리 능력자’ 김기호 씨는 다양한 첨가물로 막걸리를 제조하는 전문가다. 그는 지역별 막걸리 맛을 블라인드 테스트로 완벽히 감별해 낸다. 판정단은 그의 놀라운 능력에 후한 점수를 매겨 장려금을 줬다.

MBC ‘능력자들’(매주 금요일 오후 9시30분)은 이른바 ‘덕후’들의 세상을 소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덕후는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바꾼 말. ‘먹방’과 ‘음악’이 대세인 예능 방송계에 ‘취향 저격’을 기치로 내걸었다. 지난 추석에 파일럿으로 방송한 뒤 인기를 얻자 지난달 13일부터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덕후들의 면면은 다채롭다. ‘버스 덕후’는 러시아로 수출하는 한국산 구형 버스 정보를 얻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워 현지 카페 친구들과 교류하고 있다. 엔진 소리만으로도 버스 차종을 맞히는 그는 버스에 대해 “네 덕분에 보람찬 삶을 살 수 있었다. 평생 함께하자. 고맙다”는 진심 어린 영상편지를 전한다. 게스트로 출연한 가수 정용화는 “그 진정성에 나도 눈물이 날 것 같다”며 감동한다.

30년간 괴수 영화들을 섭렵해 괴수 소리를 구분해 내거나 비행기 날개만으로도 기종을 맞히는 능력자도 출연했다. 굴뚝새의 귀여운 모습에 반해 ‘새 능력자’가 된 스무 살 청년은 부화기를 만들어 직접 부화시키고, 소리만 듣고도 새의 정체를 알아낸다. 국내 최대 추리 카페를 운영하는 젊은이는 집안 물건이 놓여 있는 상태를 보고 주인의 모습을 추리해 낸다. 출연자보다 더 많이 아는 ‘무한도전’의 광팬, 치킨을 보고 브랜드를 맞히는 치킨 전문가, 상가를 빌려 열대어만을 위한 ‘물방’까지 마련한 ‘열대어 덕후’ 등 다양한 분야의 독특한 인물들은 다른 차원의 재미를 선사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학위 없는 전문가’인 그들은 때로는 가슴 뭉클한 진정성을 전해 준다. 네트워크의 발달로 지식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덕후들은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신지식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은 이들을 단순한 마니아를 넘어 새로운 전문가로 보도록 시선을 바꿔놓고 있다.

제작진은 우리 주변의 숨은 능력자를 찾아 알리면서 현대인의 독특한 취미생활을 널리 장려하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한다. 시청자들의 잠자고 있던 덕심(덕후 마인드)을 일깨워 새로운 ‘덕후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게 목표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이지선 PD는 “‘무한도전’을 보던 중 아이유 덕후 유재환 씨를 보고 ‘한 분야만 파도 성공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며 “한 가지를 깊고도 뜨겁게 사랑하는 덕후의 삶이 감동을 준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은 열정이 넘치는 한국인의 정서에도 잘 어울린다는 평가다. 최근 인크루트의 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80% 이상이 ‘나에겐 덕후 기질이 있다’고 대답했다. 앞으로 덕후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77%나 됐다. 음지에서 활동하던 덕후들의 저력이 세상을 바꿀 또 다른 에너지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재혁 대중문화 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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