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경제활성화법 직권상정 요청한 박 대통령
일자리 갈망하는 청년 요구 저버리지 말아야
핵심입법 지연으로 후속 개혁에 악영향 우려
권한 밖이라며 거부한 정 의장
직권상정은 국가 비상사태 때 가능한데
지금 경제 상황을 그렇게 볼 수 없다
[ 이정호 기자 ] 노동개혁 5개 법안과 서비스산업발전 기본법 등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놓고 청와대와 정의화 국회의장이 정면충돌했다. 야당 반대로 표류하고 있는 이들 법안을 국회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해달라는 청와대의 요구에 대해 정 의장은 16일 “법적으로 안 된다”고 거부했다. 새누리당은 이날 의원총회에서 정 의장에게 쟁점법안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결의서를 당 의원 전원 명의로 채택했다. 청와대·새누리당과 새누리당 출신 국회의장이 갈등을 빚자 야당은 정 의장을 두둔하고 나섰다.
◆여당 대 여당 출신 의장 충돌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국회가)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을 제쳐두고 무슨 정치개혁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며 “국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국민을 대변하기 위해서다. 정치개혁을 먼 데서 찾지 말고 국민을 위한 자리에서 찾고 국민을 위한 소신과 신념으로 찾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노동개혁 및 경제활성화법의 처리를 ‘국민이 바라는 일’로 규정하고 “부디 올해가 가기 전에 일자리를 갈망하는 청년들의 요구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노동개혁 5개 법안,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구조개혁과 경제활성화를 위한 핵심 입법이 지연되고 있어 후속 개혁 추진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전날 현기환 정무수석이 국회에서 정 의장을 만나 요청한 노동개혁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기업활력제고법, 테러방지법의 직권상정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란 해석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여권 관계자는 “3권분립 원칙을 밝혀온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을 요구한 이유는 주요 정책이 입법 지연으로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연내 법안 처리가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되면 담화 등을 통한 대국민 직접 설득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새누리당 지도부도 청와대와 보조를 맞추며 긴급재정명령권 발동까지 언급했다. 김무성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긴급재정명령을 검토할 수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정갑윤 국회부의장은 “15일자 한국경제신문에 게재된 칼럼을 보면 ‘조선 해운 철강 기계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다. 전자 자동차를 바라보는 심정도 까맣 ?탄다. 부동산마저 꺼지면 파국이요, 말 그대로 종착역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고 했다”며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에 준하는 입법 조치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이인제 최고위원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이걸(직권상정) 못하면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통령의 긴급권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직권상정 요건 해석 놓고 이견
정 의장은 이 같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직권상정 요청을 거부했다. 정 의장은 기자간담회에서 “국가 비상사태에 (직권상정이) 가능하다고 돼 있는데 과연 지금 경제 상황을 그렇게 볼 수 있느냐 하는 데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직권상정을 요청한 현 수석에게 내가 직권상정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찾아봐달라고 오히려 부탁했다”며 “내가 안 하는 게 아니고 법적으로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임을 알아달라”고 설명했다.
정 의장은 직권상정 요구서를 갖고 의장실을 찾아온 새누리당의 원유철 원내대표와 김정훈 정책위의장에게 고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주요 쟁점 법안의 직권상정 가능 여부를 둘러싼 청와대와 정 의장의 이견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규정한 국회법 85조의 조문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회법 85조는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국가 비상사태 △여야 합의 경우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청와대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임박한 데다 경제 버팀목이던 수출이 둔화세를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비상사태’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 긴급재정명령
국회 소집을 기다릴 여유가 없을 때에 한해 대통령이 재정 처분의 실효성을 뒷받침하려는 취지에서 발동하는 긴급 명령조치. 헌법 76조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한으로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시행할 때 이 제도를 사용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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