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모나미 볼펜

입력 2016-01-06 17:47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볼펜의 탄생도 그런 사례다. 19세기 중후반까지 잉크 필기구는 거의 깃펜이었다. 1884년 워터맨이 만년필을 개발한 뒤 일대 변화가 일어났지만 만년필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신문기자들에겐 더욱 고역이었다. 1938년 헝가리 기자 비로 라슬로가 윤전기 잉크를 넣고 촉에 볼을 단 펜을 고안했으니, 이것이 볼펜의 시초다.

우리나라가 볼펜을 처음 만든 것은 1963년. 그림도구 업체 광신화학공업의 송삼석 창업자가 모나미 물감과 왕자파스에 이어 세 번째로 개발한 히트 상품이 ‘모나미 153 볼펜’이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회사보다 제품명이 더 유명해져서 몇 년 뒤엔 아예 사명을 (주)모나미로 바꿨다. 1970년대 후반엔 미국에 상륙했다. 현재 수출국은 100여개로 늘었다.

하얀 육각면에 새겨진 ‘monami 153 0.7’ 디자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브랜드명은 프랑스어로 ‘내 친구(mon ami)’라는 뜻이다. 153은 ‘베드로가 예수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다’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따 온 숫자라고 한다. 그때 볼펜 한 자루 값은 15원이었다. 시내버스 요금이 15원이고 신문 한 부 값이 15원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153에는 가격이 15원이고 회사의 세 번째 제품이라는 뜻도 포함됐다. 0.7은 글씨 굵기 0.7㎜를 의미한다.

모나미가 처음부터 탄탄대로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창업자는 서울대 상학과 재학 때 인민군에 붙잡혀 죽을 뻔했다. 감옥에서 최후를 기다리다 가까스로 탈출한 끝에 훗날 창업할 수 있었다. 서울 성수동 공장에 불이 나 문을 닫을 위기도 겪었다. 그런 고비 끝에 1960년 이후 한국인의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친 ‘코리아 디자인’에 선정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모나미 153’은 반세기 동안 세계 곳곳에서 40억 자루 가까이 팔렸다. 그러나 경쟁의 파도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안주는 곧 퇴보를 의미한다. 2년 전부터 ‘153 리미티드’를 시작으로 고급 제품을 선보이며 또 다른 혁신에 나선 이유다. 출판사와 손잡고 헤밍웨이 등 유명작가 한정판 볼펜도 제작했다.

그 덕분에 지난해 1만원짜리 이상 고급품 매출이 전년 대비 92%나 늘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물기에 잘 써지는 마카’도 곧 선보일 모양이다. 직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틈나는 대로 나가서 돌아다니라’는 것이라고 한다. ‘국민 볼펜’의 다양한 변신 노력이 믿음직하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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