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속가공업체 사이조인크스 "머리카락 굵기 3분의 1도 가공"…불황 뚫은 교토 중소기업의 '기술 혁신'

입력 2016-01-08 07:00  

김낙훈의 현장속으로

"원하는 샘플, 다 만들어준다"
후지쓰·히타치 등 대기업이 주고객…설계도만 있으면 3일 안에 납품
경기침체에도 1인당 매출 2억원

지역 중소기업 손잡고 일감 확보
대기업 하청만으론 생존 힘들어…29개 업체 모여 공동 수주 활동
"자발적 협업, 국내 중소기업 적용할 만"



[ 김낙훈 기자 ]
천년 고도(古都)인 일본 교토에는 강한 중소기업이 많다. 도쿄와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불황을 헤쳐가고 있다. 요즘에는 ‘협업’을 통해 시장 개척에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협업 모델 중 하나가 시작품(prototype)을 공동 수주하는 ‘교토시작네트’다. 이를 주도하는 기업인 사이조인크스를 가봤다.

교토에 있는 사이조인크스(사장 스즈키 시게아키)의 공장 3층에 들어서면 작은 곤충들이 전시돼 있다. 나비 사마귀 잠자리 등이 박제된 듯 유리상자 안에 들어 있다. 잠자리의 날개는 당장이捉?펄떡일 듯하다. 두께 50㎛의 금속박판으로 제작한 것이다. 정밀도는 10㎛에 이른다. 이 회사의 정밀가공 능력을 보여주는 샘플이다. 이 회사는 ‘원하는 샘플은 무엇이든 만들어준다’는 구호를 내걸고 대기업으로부터 수주해 납품하고 있다.

교토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이 회사는 종업원 97명이 일하는 중소기업이다. 레이저가공기 방전가공기 연삭기 프레스 등의 설비를 갖추고 쇠를 깎는다. 주요 생산제품은 커넥터, 릴레이, 스위치, 자동차부품, 방열판용 핀 등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중소기업이지만 이 회사에는 옴론 후지쓰 스미토모전기 교세라 히타치 등 대기업 관계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덕분에 매출도 꾸준히 늘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10억엔 수준이던 이 회사의 매출은 2013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에는 20억6000만엔으로 2배가량으로 뛰었다. 매출 중 금속가공을 통한 양산제품이 62%, 시작품이 35%, 금형이 3%를 차지한다. 10여년 새 매출이 2배로 뛴 것이 큰 성과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에 빠져 중소기업의 폐업이 줄을 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꾸준히 성장한 셈이다. 1인당 연 매출은 한화로 약 2억원에 이른다.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뛰어난 금속박판 가공 능력이다. 이 회사의 스즈키 다쓰야 부장은 “금속박판을 우리처럼 정밀가공할 수 있는 업체는 흔치 않다”며 “30㎛ 수준의 박판도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30㎛면 머리카락 굵기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시작품 종류?열교환기 핀, 스위치, 전자부품, 모터, 릴레이, 차량용 전장부품, 통신기기용 모듈, 산업기기, 의료기기, 2차전지 부품 등이다. 이들 시작품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개발용과 개량용, 양산용 시작품이다. 발주자가 원하는 사양과 기능 원가를 감안해 주문제작해준다. 때로는 간단한 일러스터만 갖고 시작품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기술력에 힘입어 2006년 교토중소기업우수기술상을 수상했고 2008년 경제산업성의 ‘내일의 일본을 이끌고 나갈 활기찬 제조기업 300개’, 2011년 교토부의 ‘지혜경영을 실천하는 제조기업’, 2013년 긴키경제산업국의 ‘간사이제조기업’으로 뽑히기도 했다.

둘째, ‘짧은 납기’다. 이 회사는 설계도만 있으면 3일 내 납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시작품은 발주기업이 본생산에 들어가기 전에 성능 등을 테스트하기 위해 주문하는 제품이다. 빠른 납품이 필요하다. 그래야 발주기업이 본제품 생산 여부를 신속히 결정할 수 있다.

셋째, 이 지역 중소기업과 공동 수주 활동이다. 교토의 중소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시작품’을 수주하는 연합체인 ‘교토시작네트’를 세워 활동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에는 사이조를 포함해 29개사가 핵심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스즈키 부장은 “우리는 초창기부터 참여해 그동안 약 2억엔어치를 수주했다”고 설명했다.

교토시작네트는 이 지역 중소기업 가운데 △기술력이 뛰어나고 △중소기업 간 협력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자는 철학을 가진 기업인들이 △자발적으로 회비(연간 업체당 50만엔)를 내 운영하는 단체다. 교토역 부근 ‘교토리서치센터’에 자리 잡고 있다. 2000년에 발족한 이 단체는 대기업의 하청구조만으로는 생존하기 힘들다는 절박한 분위기에서 탄생한 일본 최초의 자발적인 시제품 공동 수주 모임이다. 교토시작네트라는 브랜드를 쓰다 보니 수주가 원활할 뿐 아니라 월 1회 모임을 통해 경영 정보도 교류하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참여 업체들은 총 6000여건의 상담을 벌였고 이 중 약 1500건을 수주했다. 수주 금액은 누적액으로 28억엔에 이른다. 비슷한 업종의 업체들도 있다. 그러면 시제품 수주를 놓고 다툼이 생길 만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가장 기술력이 좋고 적합한 업체를 선정해 배정하고 이런 불문율을 누구나 수긍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실력 없는 업체를 밀어주면 그 다음에 누가 일감을 주겠느냐’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이런 활동은 일본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 중소기업이 줄줄이 문을 닫았는데 교토시작네트 같은 협업 모델이 중소기업 불황 극복을 위한 하나의 돌파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중소기업청에 따르면 불황이 본격화한 1994년 일본 중소기업은 약 530만개였지만 2012년에는 385만개로 27.3% 줄었다.

최장성 KOTRA 오사카무역관장은 “대기업의 해외 진출로 수주가 감소한 데다 인구 감소라는 파도가 덮쳐 일본 중소기업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설명했다. 중소기업 지원기관인 중소기구긴키의 요시카와 시게키 판로개척부장은 “불황으로 폐업이 느는데 창업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게 중소기업 숫자가 줄어드는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국내 중소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중소제조업 가동률이 수년 동안 정상 가동률인 80%보다 낮은 70%대 초반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선재연 중소기업진흥공단 일본사무소장은 “교토시작네트는 대규모 공장의 해외 진출로 갈수록 수주가 어려워지고 있는 중소기업이 어떤 식으로 불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곽의택 한국소공인진흥협회장은 “한국의 소기업들도 자발적인 협업 조직을 통해 브랜드 파워를 키워 적극적으로 일감 확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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