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공헌 앞세워 기업에 강요하는 후원·기부…자발성 관계없이 주주 재산권 침해로 귀결

입력 2016-01-08 18:10  

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44> 오남용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동반성장기금·청년희망펀드…준조세 만들어 기업에 책임전가
이익 보장 못하는 사회공헌, 시장경제 질서의 근간 흔들어

일부선 '장기적 이익' 말하지만 확증된 적 없는 가설일 뿐
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은 이익 늘려 발전적 존속 이끄는 것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관한 개념적 혼란과 오·남용이 심각하다. 지난해 말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겠다는 발표만 해도 그렇다. FTA는 관세 인하 및 철폐를 통해 정부 개입에 의한 거래비용을 낮추고 시장교환과 경쟁을 촉진하기 때문에 국민의 경제적 후생을 높이는 효과가 크다. 따라서 국회가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과 정부는 한·중 FTA 비준안을 통과시키는 대가로 민간기업의 부담으로 매년 1000억원씩 10년에 걸쳐 총 1조원 규모의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을 야기했다.


만약 한·중 FTA로 인한 농·어촌 피해대책이 꼭 필요하고 합당한 일이라면 국회의 동의절차를 거쳐 정부의 재정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정도다. 그렇지 않고 CSR을 구실로 법적 근거도 없는 기금 조성에 민간기업을 동원하는 것은 행정 편의적 발상이나 정치 포퓰리즘의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질서의 근간인 사유 재산권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행위다. 국민의 재산권을 지켜줘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가 거꾸로 재산권을 침해하면 개인도 기업도 맘 놓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번 돈을 제3자가 자신의 쌈짓돈인 양 꺼내가는 사회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산권의 실질적 보호가 경제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는 사실은 일찍이 《국부론》(1776)에서 애덤 스미스도 강조한 내용이다. 스미스는 상업과 공업이 번성하고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재산권 및 계약의 보호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재산권 및 계약을 보호하는 일이 ‘정부의 정의(justice of government)’이며, 정부의 정의에 대한 신뢰가 없는 나라에서는 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에 조세법률주의를 명시하는 까닭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즉 법률의 근거 없이 국가는 조세를 부과·징수할 수 없고 국민은 조세 납부를 강요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국가의 최상위 규범에 못박음으로써 정부의 재량적 판단이나 임의적 정책에 의해 국민의 재산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올림픽 같은 체육행사 유치와 준비, 국제적 정치·외교·문화행사에 기업들?후원과 기부는 당연한 일처럼 됐다. 국내의 다양한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사업에 기업이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면 이명박 정부 때 만든 미소금융과 동반성장기금을 위해 대기업들은 지금도 많게는 매년 수백억원씩 내야 한다. 현 정부 들어서는 청년희망펀드, 창조혁신센터에 이번의 상생협력기금에 이르기까지 법적 근거가 없는데도 세금과 진배없이 내야 하는 준조세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니 규제가 아니라 해도 정부와 정치권 등쌀에 한국에서 대기업을 하는 게 갈수록 어렵다는 말이 나올 법하다.

여기에 대해 관련 당사자들은 CSR 차원에서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설령 자발적으로 했다고 해도 재산권 침해라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해당 기업이 개인회사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장회사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주식이 공개된 회사라면 돈의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잔여 청구권이 있는 주주들이다. 경영자가 사회공헌 또는 사회적 책임의 이름으로 정부의 정책성 사업이나 다양한 공익사업에 통 큰 기부를 하는 것은 그것이 다시 회사의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주주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혹자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은 회사의 평판을 높이고, 평판은 다시 경영실적을 개선시킬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주주에게도 손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CSR을 하면 경영실적이 개선된다는 주장은 통계적으로 확증되지 않은 가설일 뿐이다. 오히려 돈을 많이 번 기업들이 돈을 쓰기 위해 CSR을 강조한다는 반대 가설도 있다.

어느 경우든 분명?점은 경영자로서는 사회공헌 사업을 많이 하는 게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이라는 사실이다. 회사의 자원으로 경영자가 선호하는 사회적 책임사업을 하면 주주는 손해를 봐도 경영자 자신의 명성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주주의 가치와 회사의 발전적 존속을 위해 써야 할 이익을 다른 데에 쓰다 보면 경쟁력이 약화되는 문제가 생기고 급기야는 종업원 해고를 비롯한 구조조정 상황까지 몰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임기 이후의 나중 문제다. 이 때문에 특히 주식의 소유가 분산되거나 주인이 없는 회사의 경영자일수록 CSR 개념을 확대 해석하거나 오·남용하려는 유인이 상존한다.

이렇듯 CSR을 구실로 회사 자원을 오·남용하는 것은 경영자의 자발성과 관계없이 주식회사의 재산권 원리에 어긋나고, 기업의 영속성과 경제 전반에 부작용을 끼칠 소지가 있다. 이에 자유주의 시카고학파를 이끌었던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며 환경문제나 사회 불평등을 해결하겠다고 앞장서는 것은 위선 아니면 정신분열증이며,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까지 혹평한다. 해당 기업인의 철학이 정말로 그렇다면 회사의 자원이 아니라 개인의 자원으로 사회적 책임활동에 나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법령과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기망이나 사기를 치지 않고 회사의 이익을 늘리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는 것이 기업의 유일무이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게 프리드먼의 논지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계속되는 경기불황 속에서 실적 부진의 몸살을 앓는 기업이 많다. 지금이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업이 도산할 때 주주와 채권자는 물론이고 종업원, 소비자, 협력업체, 지역사회에 끼칠 피해를 생각해보면 기업의 발전적 존속이 왜 유일무이한 사회적 책임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을 보는 관점

사회적 협약의 산물에서 주주 재산으로 인식 변화

기업을 보는 관점은 재산권과 사회적 실체론으로 양분된다. 전자는 기업을 주주의 재산으로 보며 주주 자본주의를 뒷받침한다. 후자는 기업을 주주 외에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사회적 협약의 산물로 본다.

사회적 실체론에 의하면 기업은 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의해 유한책임의 특권과 법인격을 특별히 부여받았기 때문에 주주보다는 국가와 공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소비자 욕구의 충족, 고용 유지 외에 환경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의 개선, 그리고 기업을 국가 목적의 달성 수단으로 보는 입장도 여기에 속한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사회적 실체론이 우세했다. 그러나 기업에 대해 사회의 다양한 가치 증진에 앞장서라는 것은 정치 논리에 따라 경영하고 이윤을 배분하라는 것과 같다. 투자자, 종업원, 소비자, 협력업체, 시민단체, 지역사회가 주창하는 가치가 서로 다른데 정치 논리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바꾸다 보면 어느 기업도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공공성을 강조하는 기업관은 자기모순의 논리적 한계가 있는 데다 비효율로 귀착되기 때문에 19세기 말을 전후로 퇴조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재산권적 기업관이 확립된 계기는 1919년 미시간주 대법원에서 내린 판결(Dodge v. Ford Motor Co)이다. 이는 포드자동차 대표이던 헨리 포드가 주주 배당을 무기한 중지하겠다고 하자, 외부 주주였던 닷지 滑┛?부당하다며 소를 제기한 사건이다. 포드자동차의 당시 자본금은 200만달러였다. 120만달러를 배당하고, 회사 안에는 아직 5800만달러의 이익금이 있었지만 포드는 이후의 배당을 무기한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기업의 목적은 돈을 버는 게 전부가 아니며 다른 사회적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는 포드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시간주 대법원은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위한 활동 목적으로 조직됐음을 명시하면서 이사는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 선임되고 재량권을 부여받은 것이고, 이사가 주주의 이익을 줄이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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