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동욱 기자 ] “제가 뭣하러 들러리를 서겠습니까.”
국내 운용업계 실력자 중 한 사람인 A씨가 얼마 전 사석에서 불쑥 내뱉은 말이다. 국민연금 최고운용책임자(CIO)는 ‘운용 실력이 아닌 정치적 배경’으로 선정되기 때문에 현재 진행 중인 공모에 지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국내 운용업계의 최고경영자(CEO)나 CIO들은 대부분 이런 견해에 동의했다.
국민연금 CIO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중량급 인사들도 명함 한 장을 받으려고 안달하는 자리다. 현직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선수’들이 서로 하겠다고 경합을 벌일 법한 자리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강면욱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 권재완 AJ인베스트먼트 대표, 이동익 전 한국투자공사(KIC) 대표, 정재호 유진PE 대표(이상 가나다 순) 등 네 명이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자산 운용업 현직에서 물러났거나, 물러난 뒤 신생 사모펀드(PEF) 운용사로 갈아탄 사람들이다. 투자자들이 서로 돈을 맡기고 싶어 하는 현직 운용 전문가는 없다. 물론 현직에서 물러났다고, 현직의 성격이 다르다고 ‘감’이 떨어진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정치적 줄이 없으면 국민연금 CIO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간의 유능한 인재들이 자취를 감춘 것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퇴임 후 3년간 국내 관련 기업 및 금융회사 재취업을 막고 있는 공직자윤리법도 적지 않은 걸림돌이다. 임기(2+1년)를 마친 뒤에 3년을 쉬어야 하는 상황에서 역량 있는 전문가들의 경합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국민연금법(31조)에 따르면 CIO는 경영·경제 및 기금 운용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해외 투자와 대체 투자 경험도 갖춰야 한다. 과연 최종 후보 네 명 가운데 스스로 이런 요건을 갖췄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유력하다는 후보들의 전문성을 평가하기보다 정치적 연줄만 따져보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뽑힌 새 CIO가 5000만 국민들의 노후를 보살핀다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좌동욱 증권부 기자 leftki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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