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호 기자 ]
한미약품의 대규모 기술수출 성공이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의 연구개발(R&D) 풍토를 바꾸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1000억원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 회사는 한미약품이 유일했다. 올해는 유한양행 녹십자를 비롯해 매출 순위 상위 5개사가 1000억원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책정하는 등 이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불확실성’을 이유로 신약 개발보다 다국적 제약사의 의약품 판매 대행과 복제약 경쟁에 안주했던 국내 제약사들이 ‘한미약품 학습효과’에 앞다퉈 R&D 투자에 나서고 있다. 정윤택 보건산업진흥원 제약산업단장은 “한미약품이 연구개발 경쟁에 불을 지폈다”며 “예산을 확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 트렌드에 맞는 신약 개발 안목도 함께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깨어난 ‘연구개발 본능’
국내 상위 제약사들이 연구개발비를 대폭 늘린 것은 해외 진출을 위한 글로벌 임상시험에 속도를 내기 위해서다. 미국 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서 제품화 마지막 단계인 3상 임상시험을 단독으로 진행하는 데 약 1500억~2000억원의 자금이 들어간다. 신약 허가와 상업적 판매 단계의 리스크는 별도다. 이에 따라 국내 업체들은 △글로벌 1·2상 임상시험 △해외 유명 학회 발표 △글로벌 업체와의 협상 등을 거쳐 신약 개발 중간단계에서 글로벌 제약사에 기술을 수출하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내보다 해외 임상이 중요한 이유다. 올해 국내 상위 제약사들이 연구개발비를 크게 늘린 것도 과거에 비해 해외 임상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미약품은 올해 인성장 호르몬의 글로벌 임상 3상을 진행하는 데 상당한 자금을 투입할 예정이다. 국내외 벤처기업을 대상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예산도 크게 늘릴 계획이다.
녹십자의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1000억원)보다 30% 늘어난 1300억원을 연구개발 예산으로 책정했다. 헌터증후군 치료제 글로벌 임상과 심사가 진행 중인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면역글로불린(IVIG) 허가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한양행은 연구개발 비중이 매출의 6%에 그치는 등 그동안 신약 개발에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올해는 확연히 달라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작년(700억원)보다 44% 증가한 1004억원을 예산으로 책정했다. 약 200억원을 투입해 진행하던 신약 후보물질의 미국 임상시험을 과감하게 접는 등 신약 개발 파이프라인을 전면 수정했다.
미국에서 당뇨병성 신경병증 치료제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아ST, 자가면역질환 치료제를 비롯해 다양한 신약 파이프라인의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는 종근당 등도 연구개발비를 크게 늘리고 있다.
◆연구개발 투자 규모도 양극화
한미약품의 대규모 기술수출을 계기로 수익성 악화의 주범으로 꼽혔던 연구개발이 미래 성장 동력을 위한 필수 투자라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투자자들도 연구개발을 제약사의 성장성을 판단하는 주요 기준으로 삼고 있어 R&D 투자 비중이 높은 회사의 주가 상승률이 높은 편이다.
국내 상위 제약사들의 R&D 투자 규모는 최근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올해 상위 10개사의 평균 연구개발비가 처음으로 매출의 15% 선에 근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광동제약 제일약품 등 매출 외형은 4000억~5000억원에 달하지만 연구개발비는 매출의 1~3%대에 그치는 회사도 적지 않다.
김형호 기자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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