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합확인서' 남용 않도록 별도 지침 마련키로
[ 이유정 기자 ] 예금과 적금 위주로 자산을 관리하던 김정학 씨(양재동·69)는 지난해 5월 거래은행 직원의 권유로 4000만원을 주가연계신탁(ELT·주가연계증권을 편입한 특정금전신탁)에 투자했다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ELT의 기초자산 중 하나인 홍콩항셍중국기업지수(HSCEI)가 8개월 만에 반 토막이 나면서 원금 손실 위험에 처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원금손실 위험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절대 투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은행에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위험한 걸 알고도 투자한다는 ‘부적합확인서’를 직접 작성한 만큼 절차상 문제는 없다”는 게 은행 측 설명이다.
◆금감원 대책 마련 착수
은행과 증권사들이 보수적인 투자 성향의 투자자에게 주가연계증권(ELS)처럼 구조가 복잡하고 원금 손실 위험이 있는 금융상품을 파는 데 제동이 걸릴 전망이다. 금융당국이 고객의 투자 성향과 관계없이 위험한 상품에 투자하도록 하는 판매사들의 ‘부적합 금융상품 거래확인서’ 남용 관행을 차단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금융회사가 상품을 추천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담은 ‘투자권유 불원확인서’에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관행도 없애기로 했다.
금융감독원은 24일 부적합확인서와 불원확인서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부적합확인서 사용 비중이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거나, 투자 성향이 매우 보수적인 고객에게는 사용을 자제하는 등의 내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판매창구 직원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투자자에게 상품을 권유하기 전에 ‘투자성향평가’를 진행해야 한다. 투자 성향은 △공격투자형 △적극투자형 △위험중립형 △안정추구형 △안정형 등 다섯 단계로 나뉘며 원칙적으로 투자자의 등급에 맞는 상품만 가입을 권유할 수 있다. 안정형이나 안정추구형으로 분류된 투자자에게 ELS와 같은 고위험 상품을 권하면 안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부적합확인서와 불원확인서가 첨부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두 서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투자자에게 위험도가 높은 금융상품을 권유하는 데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역할을 한다. 고객이 자의로 위험 상품에 가입한다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불완전판매 논란 불거지나
금융당국은 투자자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마련한 확인서 제도가 일부 판매직원의 실적 쌓기와 책임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는 점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금감원이 지난해 8월 말 ELT 판매 규모가 큰 4대 은행의 판매 실태를 점검한 결과 부적합확인서 사용 비중은 52%에 달했다. 은행에서 ELS 관련 상품을 산 투자자 중 절반이 고위험 상품 투자에 적합하지 않은 보수적인 투자자였다는 얘기다. 대부분 파생상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고령층이었다.
금감원이 김기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2~2014년 개인에게 판매된 전체 ELS 가운데 60대 이상 고령자 비중은 30%에 달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ELS는 투자 원금의 1% 안팎이 수수료로 떨어질 만큼 판매사에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는 상품”이라며 “실적을 올리기 위해 투자 성향에 맞지 않더라도 적극적으로 상품을 권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
투자자가 직원의 권유로 부적합확인서를 쓰고 ELS를 샀더라도 판매사에 불완전판매 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다. 자필 서명이 들어간 만큼, 불완전판매로 보기 힘들다는 해석이 많다. 금감원 관계자는 “은행 직원이 고위험 상품을 강권한 녹취 증거가 없다면 판매사 과실을 증명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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