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공부] 한반도 노린 청나라·일본의 다툼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본격적인 근대사가 시작되다

입력 2016-01-29 17:22   수정 2016-01-29 17:24

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6)


일본은 1860년대부터 시작된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한 발 먼저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일원이 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던 일본은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먼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청나라와 러시아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죠. 일본은 전쟁을 치러서라도 청나라와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청나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농민군과 조정의 화해, 전주화약

3000명이 넘는 일본 군대는 인천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군대에 일본 군대까지 외국 세력이 한반도 중심부에 진을 치자 농민군은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하필 6월 초로, 보리 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였죠. 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에 전봉준은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의 개혁과 탐관오리의 제거를 주장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제안했습니다. 개혁을 약속한다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농민군과 조정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했습니다. 그때 화해의 약속이 전주에서 이뤄졌기에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폐정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조정과 농민군이 화해를 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진정됐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둬버렸습니다. 그러고는 흥선대원군을 앞장세워 친일 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곧이어 서해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함을 기습 공격해 세 척의 배를 격침했습니다.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청나라에 일방적으로 승리했죠. 청나라가 한반도에서 손을 떼야 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심지어 청나라는 전쟁에 진 대가로 랴오둥이라는 넓은 땅을 일본에 내줘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 청일전쟁

이 무렵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다시 봉기했습니다. 이번에는 탐관오리가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일어선 농민군은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을 당?수 없었지요. 수많은 농민군이 죽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농민군을 이끌던 전봉준은 관군에 붙잡혀 사형을 당했습니다.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은 자기들 마음대로 조선을 주무를 수 있게 됐죠. 가뒀던 고종을 풀어주고 군국기무처라는 관청을 두게 했습니다. 김홍집을 내세워 친일 내각을 세웠고,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갑오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894년에 시작돼 3년 만에 마무리된 갑오개혁에는 조선 사회의 폐단이라 여겨지던 여러 제도 및 관습에 대한 개혁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양반과 상민을 나누는 신분 제도, 노비 제도, 어린 시절 결혼하는 조혼 제도를 없앴죠. 문관을 우대하고 무관을 하찮게 여기던 차별, 가족 중 죄인이 있으면 함께 죄인이 되는 죄인연좌법도 폐지했습니다. 또 과부의 재혼을 허용했습니다. 갑오개혁은 우리 역사를 전근대와 근대로 나누는 분기점으로 여겨집니다. 비록 일본의 강요로 시작됐지만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대대적인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전근대와 근대의 분기점, 갑오개혁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얻으려 했던 가장 큰 노림수는 청나라와 조선의 긴밀한 관계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어놔야 자신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나라만 일본의 적수였던 것은 아니에요.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기세가 하늘까지 솟았던 일본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간섭에 나선 것입니다. 일본이 전리품으로 랴오둥을 챙긴 것은 너무 심하다고 비난한, 이른바 삼국간섭 사건이죠.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의 두 나라까지 나서는 바람에 일본은 슬그머니 랴오둥을 도로 내놨습니다.

이때 조선의 왕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조선 혼자의 힘으로는 그 험한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이왕이면 가장 강한 나라의 도움을 받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죠. 어떤 나라가 강한 나라였을까요? 몇백 년 동안 한반도에 종주국 역할을 했던 나라는 중국입니다.

그런 중국을 물리친 나라가 일본이죠. 중국을 이긴 일본을 압박해 랴오둥을 내놓게 한 나라는 러시아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열강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나라 중 러시아가 가장 힘센 나라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러 내각을 세웠습니다. 그 친러 세력의 중심에 명성황후가 있었습니다.

글=황인희 / 사진=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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