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익 기자 ] 조선 정조(1752~1800) 때 조정이 거행한 제사는 연평균 347건이었다. 하루에 0.95회꼴로 거의 매일 제사를 지낸 셈이다. 왕릉, 왕의 초상을 모신 진전, 사친(왕이 아니지만 왕을 낳은 부모)의 궁묘 등에서 지낸 제사만 225건이었고, 종묘까지 더한다면 국가 제사 대부분은 왕실을 위한 것이었다.
왕실 제사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 왕실문화의 성격을 탐구한 책 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한국학중앙연구원 펴냄)이 출간됐다.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연구원이 저자다.
조선 후기에 급격히 늘어난 왕실 제사는 국정 운영의 위기를 초래했다. 한식(寒食) 제사 때는 제관만 120여명이 필요했다. 한정된 관리로 많은 의식을 치르기 어려워지자 점차 직무가 없는 관리, 지위가 낮거나 나이 든 관리 등이 제향(祭享)에 차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종묘에서 제향을 마치려면 6~7시간이나 걸려 종묘에 나오지 않으려는 신하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실은 무엇보다 제사를 중요히 여겼다.
저자는 “조선 후기에 이뤄진 제향 개혁은 왕실의 권위와 국정 운영의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며 “정조 때의 종묘개혁이나 고 ?때의 제관 차출 방식 변화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유교의 원칙과 달리 왕실 제사가 계속 늘어났던 이유도 주목할 부분이다. 유교 제사의 특징으로 꼽히는 ‘질훼(迭毁)의 법칙’을 따르자면 종묘에선 태조와 4대 이내의 선왕에게만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전주 이씨 시조까지 제향에 포함했다. 이런 현상은 유교 예법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문화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제사의 필수 요소인 제물(祭物)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다. 제사가 항상 정성껏 치러지길 바라는 국왕의 눈에는 관리와 숙수들의 준비가 부족해 보였다. 이 때문에 제사를 지내는 향소(享所) 관원과 제관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했다. 자식 된 도리로 정결한 제물이 제사상에 놓이길 기대하는 국왕과, 제향을 관습화된 업무로 처리한 관리들의 모습은 확연히 대비된다. 저자는 “제물을 향한 서로 다른 시선 속에서 국가 제향이 어떻게 변모했는지 살피는 것은 국가 제사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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