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희생자에 한·일 정부 관심 갖기를"

입력 2016-02-02 17:36  

불교계, 1942년 일본 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현장서 첫 위령제


[ 고재연 기자 ]
“아버지, 저 왔어요. 보고 싶어요!”

지난달 30일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남쪽으로 61㎞를 달려 도착한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바닷가. 74년 전 조세이(長生)탄광 수몰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전석호 씨(85)는 바다를 향해 이렇게 외친 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희생자 183명 중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 136명에 달하던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는 최악의 참사였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해저탄광은 10㎞에 이를 만큼 길게 뻗어 있었다. 지나가는 뱃소리가 들릴 만큼 갱도가 해저면 바로 아래에 붙어 있어 수시로 누수 위험에 시달렸다. 위험한 해저탄광에는 주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이 끌려갔다. 사고 당일 상황을 전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1942년 2월3일 오전, 니시키와소학교에서 수업 중이었는데 선생님이 ‘바다에서 사고가 났으니 탄광 근처에 사는 학생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라’고 했어요. 바닷가로 달려가 보니 환기구에선 물기둥이 솟구쳤고, 갱도 입구는 울음소리로 가득했어요. 우리 5남매는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뒤 사택에서 쫓겨났고, 동기생 집에 딸린 마구?【?어머니와 5남매가 살아야 했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뒤 일본 정부는 민간 기업 과실이라는 이유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고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우베여고 역사교사였던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1930~2014)가 수몰사고에 대한 논문을 1976년 발표하면서다. 1991년 그와 양심 있는 일본인들이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새기는모임)을 만들어 성금 3000만엔을 모아 마을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이날 이곳에서 불교계가 마련한 첫 위령제가 열렸다. 위령제에는 당시 사고로 수장된 한인 강제징용 희생자 유족 16명과 조계종 천태종 진각종 등 한국 불교계 승려 40여명, 일본인 130여명이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바닷가에서 헌화를 마친 참석자들은 500m가량 떨어진 추모비 앞에서 망자들의 영혼을 극락으로 보내는 천도재를 올렸다. 비구니가 범패(梵唄) 소리에 맞춰 바라춤과 나비춤을 추기 시작하자 유족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전쟁에 집착한 잘못된 욕심이 수몰사고 희생자들의 고통과 속박을 올곧게 치유하지 못하고 인간의 도리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며 “고향 산하에 머물듯 가족의 품에 안기듯, 삼가 평온한 날을 위해 기도한다”고 말했다.

새기는모임은 유골 수습을 위해 100만엔을 들여 전문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반응은 소극적이다. 한국에서도 조세이탄광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모임 공동대표(65)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는 피해자 대부분이 조선인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라며 “일본 정부는 解타?직시하고, 한국 정부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우베=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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