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 역사 속에는 반 천년도 훨씬 전에 이미 이러한 기업가정신을 발현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업을 번성시킨 사람들이 있다.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경영시스템 도입으로 상권을 장악했던 조선의 개성상인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개성상인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후반까지 국가 전체의 경제를 좌우하던 대표적인 상인이다. 그들은 근면성실함과 탁월한 장사 시기 판단력 등 기업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장사를 이끌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기풍과 더불어 개성상인들은 그들만의 세련된 경영시스템을 개발하고 활용하여 사업운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송방이라는 체계적인 유통시스템을 활용하고, 그들만의 계명을 만들어 상도를 지키는 등 구조적으로 상업 활동을 시행하며 조선의 상권을 섭렵했다. 또한 도전적인 시장개척으로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에 인삼 교역을 활성화시켰고,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국제무역을 주도하는 상인으로 성장했다.
개성상인들이 이처럼 상권을 장악하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합리적인 경영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경영에서 사용하는 기법들을 이미 활용하고 있었다. 보증인을 두고 신용에 따라 금리를 차등 적용하여 대출해주는 시변제(時邊制)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드시 다른 상가에서 다년간 수습을 거친 뒤 가업을 이어받는 일종의 인사수습제도인 차인제(差人制)를 활용했으며, 그들이 직접 고안해낸 회계처리시스템인 사개치부법(四介治簿法)을 사용했다. 이 중 사개치부법은 거대한 유통구조와 다양한 사업 품목 등 복잡하고 방대한 개성상인의 사업영역을 관리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경영시스템으로 꼽을 수 있다.
사개치부법은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재무제표에 해당한다. 한자 뜻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네 가지 요소가 긴밀하게 관련된 형태로 장부를 기록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네 가지 요소는 거래 기록에 필수적 요소인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어지는 것, 받아지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자본의 흐름과 거래 내역을 채권, 채무, 매입, 매각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금의 흐름을 현대식 회계처리 방식인 복식부기 원리를 사용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것이다.
부기는 장부에 기록한다는 것을 뜻하며 복식부기는 장부를 반으로 나누어 자금의 변동 내역을 특성에 따라 양변에 구분하여 기록하는 방식을 말한다. 복식부기 사용이 놀라운 이유는 장부 구성의 체계성과 자금관리의 효율성에 있다. 복식부기에 대응되는 개념인 단식부기와 비교해보면 이해가 보다 쉽다. 단식부기는 거래가 발생된 시간 순서에 따라 단순히 나열하는 형태의 기록이다. 어릴 적 종종 사용하던 용돈기입장에 용돈의 금액과 용돈 사용 내역을 차례로 기록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단식부기의 방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면에 복식부기는 반으로 나눈 장부의 오른쪽은 대변, 왼쪽은 차변이라 지칭하여 거래가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대해 대변과 차변, 양 쪽에 두 번의 기록을 한다. 대변에는 수입과 자금 조달 방법에 대한 내용을 기입하고, 차변에는 자금의 사용내역을 기입한다.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로 현금을 5만원을 받았다면, ‘현금 5만원’을 차변에 기입하고 동시에 대변에는 ‘아르바이트 5만원’ 이라고 기입하여 자금의 출처를 기록할 수 있다. 또한 이후에 책을 1만원에 구입했다면, 자금의 사용내역인 ‘책 구입 1만원’을 차변에 기입하고, 가지고 있던 현금으로 책을 구입했음을 기록하기 위해 대변에 ‘현금 1만원’을 기입한다.
이처럼 한 가지 거래를 양변에 동시에 기록하기 때문에 차변과 대변의 합계는 항상 일치한다. 이를 대차평균의 원리라고 하는데, 이 대차평균을 확인함으로써 장부상의 오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개성상인들은 복식부기 형태의 사개치부법을 사용함으로써 장부의 자동검증기능을 갖추었고, 복잡한 상거래를 한 눈에 살펴보며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복식부기는 이처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시스템을 갖춘 회계처리방법이기에 개성상인들이 이미 현대식 회계법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전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이슈이다. 개성상인의 복식부기 장부를 발견하기 이전에는 149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이 기록한 장부가 최초의 복식부기 장부로 여겨졌으나, 사개치부법 복식부기의 실존이 증명됨에 따라 개성상인이 2세기나 앞선 시기에 이미 우수한 회계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음이 판명됐다.
실제로 2013년도에 개성상인 가문이 보유한 19세기 복식부기 회계장부 14권이 발견되었고, 2014년 2월에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제 587호로 등록되어 그 역사적 가치 또한 인정받았다. 본 장부에는 25년 동안의 약 30만 건의 거래내역이 기록되어 있는데 주요장부인 일기장과 장책, 보조장부인 주회계책 등으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있다. 현대식 회계방식과 일치하는 형태로 여러 개의 장부에 거래의 전 과정이 복식부기로 작성되어 있다고 하니 시대를 앞서간 우리 선조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상거래가 활성화되고, 무역이 성행하게 되면 각 경제주체들은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회계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복잡한 상거래 속에서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합리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유용한 재무정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개성상인들은 일찍이 그 필요성을 깨달았던 듯하다.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시대를 앞선 과학적인 회계정보 처리방법을 고안해 냈으니 말이다. 상인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혁신적인 회계기법과 경영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업을 활성화시킨 개성상인들이야말로 역사 속 최고의 기업가가 아닌가 싶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복식부기에 담긴 경제적 합리주의가 곧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의 뜻을 미루어 생각해 보면, 조선의 개성상인이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상인으로 성장한 것은 극명한 필연일 수밖에 없었던 듯싶다.
김민정 < KDI 연구원 kimmj@kdi.re.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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