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 꼭 가야 할 호텔 랄베레타
프란치아코르타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동쪽에 자리 잡은 와인 산지다.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을 대표하는 곳으로 현지인에게 프란치아코르타는 곧 최고 스파클링 와인을 뜻한다. 지갑이 두둑하지 않으면 주문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쉬운 점이랄까. 와인 마니아가 꿈꾸는 전설적인 와인 산지에 왔다는 것에 적잖이 흥분됐다.
아침에 호텔에서 눈을 떠 커튼을 열다가 그만 멈춰 버렸다. 가까운 곳에 늘 꿈꾸던 알프스산이 있다. 정상은 하늘과 맞닿아 있고 순백의 만년설은 구름과 하나가 돼 띠를 이룬다. 그 아래로 롬바르디아지방의 마을들이 이어진다. 간밤에 밀라노의 공항에서 어둠을 뚫고 이곳에 왔을 때는 그저 작은 시골 마을에 불과해 보였다. 누군가가 밤새 마법이라도 부린 듯 확 변해버린 정경이 놀랍기만 하다.
숙박한 호텔은 1800년대 왕족의 저택을 개조한 것이다. 헬렌 아널드가 지은 책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 휴양지 1001’에 소개된 랄베레타가 이곳이다. 미슐랭 레스토랑, 멋진 수영장, 최고급 스파, 헬리콥터 착륙장까지 갖췄다. 아침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내려가니 객실 창문 너머로 보이던 풍경이 테라스 앞으로 드넓게 펼쳐진다. 알프스 산 아래로 이세오호수가 안개를 머금고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간단한 조식을 앞에 두고 그 풍경을 눈에 담으며 호사를 누려본다. 호수 주변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고 호텔 직원이 귀띔한다.
조언에 따라 호수를 찾아 나섰다. 호텔에서 11㎞, 차로 약 20분 거리다. 투숙객이 원하면 가까운 거리는 차로 데려다 주는 서비스도 해준다. 가까이서 마주한 호수는 둘레가 65㎞에 이른다.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남자, 개를 산책시키는 주민,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연인…. 번잡스러운 관광지와 달리 고즈넉한 분위기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다. 마침 안개를 머금은 수면과 구름 덮인 하늘 사이를 가르듯 유람선이 지나갔다.
밤이 되면 당신을 유혹하죠... 마逼?물드는 '와인의 성지'
빙하기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
이탈리아의 대표적 와인 산지인 프란치아코르타에 왔다면 당연히 포도주를 마셔봐야 한다. 프란치아코르타는 프랑스 샴페인과 같은 방식으로 포도주를 만든다. 샹파뉴지방에서 만든 것을 샴페인(샹파뉴의 영어식 발음)이라 부르듯, 이 지역에서 제조된 와인은 통칭 프란치아코르타라고 불린다.
유명 와인 산지여서 그런지 호텔에서 쉬기만 하는 사람들도 포도밭을 산책하고 와인을 맛보는 것은 빼놓지 않는다. 직접 축복받은 땅을 만나보기로 했다. 프란치아코르타의 상급 와인은 프랑스산 고급 샴페인을 연상케 하는 놀라운 맛을 자랑한다. 인지도가 부족할 뿐, 깊이와 복합성 면에서 뒤질 것이 없어서 최근 한국에도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
호텔 정문을 나서자 바로 앞부터 포도밭이 펼쳐진다. 완만한 경사의 밭이랑이 아침 햇살을 골고루 받으며 서 있다. 야트막한 포도나무 키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흙을 만져본다. 촉촉한 석회질, 부드러운 점토, 고운 자갈이 손끝에 닿는다. 영양이 풍부하고 배수가 잘되는 땅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탐하듯 훑고 지나갔지만 공기는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프란치아코르타가 와인 생산지로 주목받은 이유 중 하나는 환경이다. 이세오호수의 물, 주변 카모니카 계곡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공기 때문에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지역의 알프스산 자락에는 올리브나무가 자라고 있을 정도로 온화하다. 흙은 빙하기 시대에 형성됐는데 빙하 이동으로 생긴 자갈, 모래, 침전토가 적당히 섞여 있다. 샴페인을 만드는 데 쓰 甄?포도인 샤르도네, 피노누아, 피노블랑을 재배하기 좋은 환경을 가진 것이다.
차별화된 브랜드 관리도 명성을 쌓는 데 한몫했다. 이탈리아산 스파클링 와인의 통상적인 명칭은 스푸만테다. 하지만 프란치아코르타산 와인에는 스푸만테라고 표기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의 다른 스파클링 와인과 차원이 다르다는 자부심의 표현이자 차별화된 브랜딩 전략이 쓰였기 때문이다.
오랜 포도주의 봉인이 풀리다
호텔에서 15㎞ 거리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란치아코르타를 만드는 벨라비스타와이너리가 있다. 함께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소믈리에, 칼럼니스트, 요리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다. 모두 최고의 와인을 만난다는 기대감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먼저 포도주 저장고를 돌아보며 양조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시음 장소로 향했다. 1987년에 생산된 오래된 포도주가 준비된 모습에 여기저기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같은 해의 포도주를 다양한 크기의 병에서 숙성시킨 여러 개의 병이 놓여 있었다. 스탠더드(750mL), 매그넘(1.5L), 제로보암(3L), 무드셀라(6L)에 이어 1989년에 담았다는 살마나자르(9L)도 나왔다.
시간의 봉인을 풀 듯 병마개를 열자 병 입구로 엷은 탄산 기체가 피어오른다. 포도주가 물결을 이루며 잔에 차오르는 모습이 우아하고 관능적이다. 참석자들은 저마다 잔을 들어 색을 살피고, 코끝으로 향을 느껴본다. 파리에서 온 부부는 10대 아들을 데려왔다. 아들에게 포도주 향을 맡게 하고, 맛을 보게 한다. 그리고 아이의 의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 다른 테이블에서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다. 균형 잡힌 맛과 질감, 오래 지속되는 거품 등을 볼 때 매그넘 병에 담긴 것이 가장 훌륭하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와인과 함께 펼쳐진 ‘놀라운 밤’
저녁에는 벨라비스타 설립자인 비토리오 모레티 회장이 방문객을 만찬에 초대했다. 모두 그와 악수를 나누며 반가운 마음을 전한다. 정찬이 하나하나 나오는 동안 무대에서는 밴드의 연주가 시작됐다. 여가수의 고혹적인 목소리에 클래식 기타 리듬과 콘트라베이스의 선율이 녹아든다. 마지막 포도주가 나오자 모레티 회장은 오늘 이 자리를 위해 ‘메라빌리오소’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메라빌리오소는 영어로 ‘훌륭한, 우수한, 놀라운’이라는 뜻이다.
회장은 포도 작황이 최고로 좋았던 1984, 1988, 1991, 1995, 2001, 2002년의 포도주를 블렌딩(연도나 품종이 다른 것을 혼합)한 특별 포도주라고 설명했다. 낮에는 같은 시간을 다른 공간에 품은 술을 맛봤다면, 저녁엔 다른 시간을 한 공간에 품은 술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러분과 이 ‘메라빌리오소’한 저녁을 나눌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회장의 건배사와 함께 와인을 목으로 넘긴다. 여러 시간이 중첩된 와인이 입안에서 오래 감돈다.
무대에서 익숙한 노래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한쪽에서는 노부부가 조용히 왈츠를 췄다. 그들을 따라 다른 테이블에서도 왈츠 선율에 몸을 맡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메라빌리오소라는 말은 유행어처럼 번졌다. 근사한 디저트가 나올 때, 셰프가 나와서 인사할 때, 여가수가 앙코르곡을 부를 때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단어를 외쳤다. 와인의 절묘한 맛과 결합하면서 단어가 주는 감흥은 더 커졌다. 다른 이탈리아어라면 몰라도, 이 말만은 잊을 수 없으리라. 메라빌리오소!
이것만은 꼭!
1. 랄베레타의 레스토랑은 프란치아코르타에서 한 번은 들러봐야 할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문의와 예약 정보는 호텔 홈페이지(albereta.it)를 참고하면 된다.
2. 이세오 호수에선 일정 간격으로 유람선이 운행된다. 트레킹이나 사이클링으로 주변을 둘러 볼 수도 있다. 자세한 정보는 이세오호수관광안내소(agenzialagoiseofranciacorta.it)에서 확인하면 된다.
3. 벨라비스타에서는 가이드 투어와 포도주 시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홈페이지(bellavistawine.it)에서 시간과 절차를 확인 후 방문하자.
4. 호텔에서 약 30㎞ 거리에 베르가모시가 있으니 함께 관광해도 좋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중세 유적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다. 옛 시가지 중심인 베키아광장에 가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라조네 궁, 시민의 탑 등 중세시대 건축물의 위용을 살펴볼 수 있다.
프란치아코르타=나보영 여행작가 alleyna20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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