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에노키앙

입력 2016-02-28 17:31   수정 2016-02-29 05:21

[ 고두현 기자 ] 유리공예품으로 유명한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 이곳에서 1295년 창업한 바로비에르&토소는 유리공예 기술만으로 세계를 석권한 가족기업이다. 입으로 긴 대롱에 바람을 불어넣어 갖가지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지금도 바로비에르 가문과 함께 ‘위대한 창조자’로 불린다.

알프스 산기슭의 소도시 가르도네에서 1526년 출발한 총기회사 베레타도 490년 된 가족기업이다.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 권총으로 유명한 베레타는 총기장인 바르톨로메오 베레타가 이곳 철광석으로 총열을 만들면서 이름을 알렸다. 베레타 총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 시장까지 석권하며 명성을 떨치고 있다.

유럽엔 200년 이상 된 가족회사가 4000여개에 이른다. 프랑스에 ‘에노키앙’이라는 국제 가족기업 모임이 있다. 이름은 300여 년을 살다 천국으로 올라간 구약 창세기의 인물 ‘에녹’에서 따왔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장수기업협회로, 풀네임은 ‘레 제노키앙(Les Henokiens)’이다. 회원 가입 절차는 매우 까다로워서 역사가 200년을 넘어야 하고 창업자의 자손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어야 하며 경영 실적도 우수해야 한다.

그래서 회원이 9개국 43개 기업에 불과하다. 이탈리아 13개, 프랑스 12개, 瞿?8개, 독일 4개 등이다. 와인의 휘겔&피스(프랑스·1639년), 구에리에리 리자르디(이탈리아·1678년), 루이 라투르(프랑스·1797년), 은행의 롬바르 오디에르(스위스·1796년), 픽텟(스위스·1805년)도 주요 멤버다. 창업 206년을 맞은 자동차업체 푸조(프랑스·1810년)가 막내다.

1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이시카야현의 온천여관 호시료칸(法師旅館·718년)이 최연장자다. ‘월계관’으로 유명한 사케 업체 겟케이칸(1637년)도 회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꼽힌 곤고구미(金剛組)는 10년 전 문을 닫아 명단에 없다.

유럽의 500여개 중견기업 중 75%가량이 가족기업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여서 신규 일자리의 78%가 가족기업에서 창출된다. 이들 기업의 이미지는 아주 좋다. 기업의 역사가 오래될수록 창업정신이 투철하고 신속한 의사 결정과 장기적인 관점으로 투자하기 때문에 소비자 신뢰도와 고용 안정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족기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국내 최장수 기업이라야 1896년 박승직 상점에서 출발한 두산으로 역사가 120년밖에 안 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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