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먼드 펠프스 지음 / 이창근·홍대운 옮김 / 열린책들
/ 576쪽 / 2만5000원
미국·영국서 꽃피운 근대적 가치관
개인들의 무수한 혁신 이끌어
인류사 유례없는 번영의 원천
국가개입 강조한 코포라티즘
유럽서 득세하며 경제 침체
근대성 되살려 역동성 회복을
[ 송태형 기자 ]
에드먼드 펠프스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경제학과 교수(83)는 2006년 거시경제 정책의 장·단기 효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넓힌 공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자연실업률’ 가설과 ‘합리적 기대’ 모형이다.
펠프스는 물가 상승으로 실질 임금이 줄어도 근로자가 임금 인상을 요구해 장기실업률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이른바 ‘펠프스 이론’을 제시했다. 물가를 낮추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반대로 실업률을 낮추면 물가가 오른다는 필립스곡선이 장기적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비자발적 실업’의 원인을 고용주의 ‘합리적 기대’로 풀어냈다. “고용주들은 임금을 결정할 때 노동자의 이직 위험을 고려해 단순히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수준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반세기 동안 경제학계를 선도해 온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펠프스가 이번에는 번영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2014년 미국에서 출간됐고, 최근 국내에서 번역돼 나온 《대번영의 조건(mass flourishing)≫에서다.
저자에 따르면 ‘번영’은 단순히 소득과 부의 증가에 따른 경제적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다수의 개인이 도전하고 모험하며, 일에서 만족을 얻고 정당한 보상을 받는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19세기 영국과 미국 등에 등장한 근대 경제는 인류사에 드문 번영을 구가했다. 번영의 원천은 평범한 개인들이 이룩한 무수히 많은 혁신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자생적 혁신’이 이뤄졌을까. 19세기 들어 개인의 성장과 참여를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와 개인주의, 민주주의 등 근대적 가치관이 점차 보편성을 확보했다. 회사법 등 상업 및 금융 제도가 경제 참여의 장벽을 허물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도전과 모험, 혁신을 강조하는 ‘문화’가 힘을 얻었다. 근대는 개인이 오직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세상에 나아가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독려했다.
근대 경제가 사람들에게 선사한 ‘일의 경험’은 적극적인 참여와 지적 만족이 주는 개인적인 만족감에 기여했고, 이는 일하는 사람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혁신 의지를 고양했다.
저자는 20세기 중반까지 번영을 가져온 근대 경제가 1960년대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먼저 근대 경제의 역동성 ?불확실성에 대한 반발로 나온 사회주의와 흔히 협동조합주의로 번역되는 ‘코포라티즘’의 역사, 한계, 문제점 등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근대 경제에 대한 좀 더 치명적인 반발은 유럽 대륙에서 1920년대 처음 등장한 코포라티즘이다. 근대 경제가 모험, 도전, 혁신 같은 근대적 가치를 옹호했다면 코포라티즘은 안정, 조화, 질서, 연대 같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했다. 코포라티즘은 근대 경제의 무질서를 비판했고 경제에 조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와 기업단체, 노동단체 간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나 돈에 대한 욕망 같은 행태의 확산을 비판하고 대신 약자와 기득권 보호를 내세웠다. 이런 ‘사회적 보호’ 개념은 각종 보조금부터 복지 부조에 이르는 다양한 정책으로 나타났다.
유럽 대륙에서 ‘제3의 길’로 받아들여진 코포라티즘은 근대 경제에 필적하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저자는 여러 지표를 통해 코포라티즘 경제의 자생적 혁신이 지극히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높은 성장률을 유지했던 것은 근대 경제로부터 혁신의 결과를 손쉽게 수입할 수 있었던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경제를 선도한 미국과 영국 등이 혁신의 동력을 잃고 성장을 멈추자 유럽 경제도 곧바로 침체에 빠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 경제가 역동성을 잃어버린 궁극적인 원인도 코포라티즘에서 찾는다. 유럽에서 수입된 코포라티즘 가치가 득세한 미국은 이제 규제로 기득권을 보호하고 과도한 보조금과 사회 복지로 혁신 의지를 저해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것은 실업 상태로 사회 부조를 받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펠프스는 “이는 명백히 수많은 인구를 경제로부터 이탈시켜 역동성을 심하게 떨어뜨린다”며 “정의롭지 않다”고 비판한다.
침체에서 벗어나 번영을 회복하는 저자의 해법은 ‘근대성 되찾기’로 요약할 수 있다. 근대 경제의 기반인 근대적 가치를 일깨워 개개인이 다시 자생적 혁신에 나설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퍼뜨려야 한다. 코포라티즘 경제에 존재하는 공공정책과 모든 정부 기관 및 관행은 축소해야 하며 일부는 아예 없애야 한다. 경제 전반에 걸쳐 평범한 사람도 새로운 것을 생각하면서 실험하고 탐험하며, 통찰력과 운만 더해지면 혁신으로 이어지는 ‘높은 역동성’을 회복하려면 근대적 가치관이 전통적 가치관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 저자는 여기에 정부의 역할이 있다고 강조한다.
펠프스는 경제뿐 아니라 철학, 문학, 사상,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지식을 동원해 그가 주장하는 번영의 개념과 논리를 뒷받침한다. 많은 경제학자와 전문가가 이 책을 “펠프스 만년의 역작” “대가의 통찰이 집약된 대담한 책”으로 평가한 이유다. 펠프스와 ‘노선’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한 번쯤 읽어봐야 할 고전으로 남을 법하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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