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북한 제재법안을 통과시키고, 북한 경제를 고립시켜 북한의 무력도발을 봉쇄하자는 쪽으로 의견 접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도 개성공단을 폐쇄했습니다.
“전쟁하자는 것이냐”라고?
일부 국내외 인사는 ‘그러면 전쟁을 하자는 것이냐’며 ‘아무리 나쁜 평화라도 전쟁보다는 낫다’고 항의했습니다. 그럴싸해 보이고 우리 감정을 울리는 멋진 표현이지만, 사실 이 발언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왜 그럴까요? 평화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고려 가능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라는 뜻입니다. 수단과 목적을 동일선상에 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애당초 성립 불가능입니다. 비교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The weather of Korea is very mild, Japan is same’이라는 문장이 있다고 합시다. 문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지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그릇된 표현입니다. ‘한국의 날씨(weather of Korea)’와 일본(Japan)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을 논리적으로 바꾸려면 ‘Japan’을 ‘weather of Japan’ 혹은 ‘that of Japan’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의 날씨=일본의 날씨’를 비교하는 구조가 성립합니다.
전쟁 대신 나라 판 매국노는 애국자?
평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평화’라고 해서 다 같은 ‘평화’가 아니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가 우리를 공격하겠다고 했을 때 대한민국이 그에 맞서 싸우는 대신 즉각 항복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이런 경우를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것은 평화가 아니라 굴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 아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께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만약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 어느 편을 드시겠느냐, 그런 논리라면 구한말 일본에 나라를 넘긴 이완용은 일제의 침략을 막고 평화를 가져온 훌륭한 분이냐고요.
국가안보는 국가와 국민의 ‘삶과 죽음을 다루는 영역’입니다. 경영과 사회복지에는 휴머니즘과 낭만주의가 작동원리로 채택될 수 있지만, 국가안보는 감상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국가의 소멸’에 대해 연구하는 미국 국제정치학자 타니샤 파잘(Tanisha Fazal)은 2007년 간행한 《국가의 죽음(State Death)》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통계자료를 제시합니다. 근대국민국가 체제가 성립하기 시작한 1816년부터 2000년까지를 연구대상으로 삼아 계산하면 이 기간 지구상에 존재했던 국가는 모두 207개국입니다. 그 가운데 서기 2000년 현재 66개국이 사라졌습니다. 전체 국가 중 약 32%가 없어진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없어진 66개국 중 무려 50개국이 이웃나라와의 전쟁의 결과로 무너졌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냉정한 현실입니다. 국가들이 모여 사는 국제사회에는 국가를 넘어서는 권위가 없습니다. 국제법이 있기는 하지만 강제력과 구속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국제사회는 어떤 면에서는 법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으며 언제든지 경우에 따라 입장과 태도가 바뀔 수 있는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한 국가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국의 ‘능력’뿐입니다.
경제력+군사력=국가능력
한 나라의 ‘능력’은 군사력, 경제력,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고 유지하는 외교력, 협상력, 문화적 영향력 등을 모두 합친 개념입니다. 국력에서 차이가 나면 협상력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말을 꺼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나라가 자국의 ‘능력’을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합니다. 국제정치학자인 이춘근 박사는 “한국 사람들의 국제정치관은 다른 나라를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평가하는데 미숙하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오랫동안 능멸당해 왔던 결과 국제정치를 감정적으로 보는 관점이 생겨났기 때문인 듯하다”고 지적합니다.
이 박사에 따르면 국제정치는 ‘이웃에 무서운 나라가 존재할 때 그에 대항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과 힘을 합치는 것이고, 그 기준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일 뿐이라는 원리가 통용되는 분야’라고 합니다. ‘안보정책이란 무서운 나라의 위협을 감소시키기 위한 제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서로 전쟁을 벌였던 미국과 일본이 최근 들어 서로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서로 좋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럴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역사적으로 묵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이것이 국제사회가 작동하는 현실입니다.
앞에서 ‘논리’이야기를 했으니 다음 예문으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명제는 논리적으로 100% 모순입니다. 문학적 비유로는 훌륭하지만 논리적으로는 옳지 않은 문장입니다. 모든 법칙에는 예외가 있거나 없거나 둘 가운데 하나겠지요? 만일 예외 없는 법칙이 있다면 위 명제는 곧바로 모순이 됩니다. 만일 모든 법칙에 예외가 있다면,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법칙에 예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 위 명제는 ‘거짓’입니다. 조금 어려운가요? 이 명제를 플로어 차트나 표로 만들어 논리적 구조를 따져보면 훨씬 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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