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예금은행 신용창출의 정당성 (37)

입력 2016-03-07 07:00  

논란예금을 기초로 창출된 대출
'정당한 은행재산'인지 논란 일으키지만
정부의 부분지급 준비금 제도로 인해
민간은행들 '신용창출' 관행 계속돼




재산권 보호가 자유시장경제의 기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적한 길가에서 A가 B의 스마트폰을 빼앗으려고 다투는 장면을 어떤 사람이 목격했다고 하자. 이때 A가 가해자고 B는 피해자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겉으로 드러난 장면만 보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한 장면만으로는 A가 정말 남의 휴대폰을 강탈하려는 나쁜 강도인지 또는 자신이 얼마 전 B에게 도둑맞은 스마폰임을 알아보고 회수하려는 선량한 시민인지 알 수 없다. 만약 B가 갖고 있던 휴대폰이 A에게서 훔친 것이라면 B의 현재 휴대폰은 정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호할 수 없다.

재산권 보호라고 할 때의 재산은 모든 재산이 아니고 ‘정당한 재산’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당한 재산의 거래만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재산권의 정당성은 거래가 일어나기 이전에 정의되고 규정돼야 한다.

재산의 정당성 문제를 특?심각하게 검토해야 하는 것은 민간은행의 업무다.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는 기본적으로 대출은행업과 예금은행업 기능을 수행한다. 은행은 이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 기능과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대출은행업이란 금융회사가 저축자와 차용자의 중간에서 자금을 중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재산의 정당성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는다. 은행이 저축자의 돈을 받아서 차용자에게 넘겨주는 것이기 때문에 은행의 행위에서 정당성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비록 저축자의 돈 그 자체가 정당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예금은행업은 기본적으로 은행이 예금자에게 안전한 보관장소를 제공하고 예금자의 거래를 결제하는 기능을 한다. 즉, 은행은 서비스 수수료를 받고 예금자가 맡긴 돈을 여러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하고, 예금자 상호 대차관계나 송금 등의 결제 기능을 하는 것이다. 원래 이 기능은 오늘날과 달리 금(金)이 화폐로 사용됐기 때문에 발달한 것이다. 그러나 화폐의 형태가 바뀐 지금도 예금은행업의 금전 보관과 결제 기능은 변한 게 없다. 정부가 발행한 지폐도 금과 같이 두 가지 기능을 모두 요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대출은행업에서 은행은 저축자로부터 재산과 그 권리를 넘겨받아 차용자에게 그 재산과 권리를 넘겨준다(차용자가 돈을 갚을 때는 반대 상황이 된다). 그러므로 은행은 저축자에게 채무를 지고 차용자에게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다. 이 점이 당사자 간 거래로 이뤄지는 부동산 거래와 다른 것이다. 이 경우에 은행은 자금을 중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지급준비금을 따로 마련해 둘 필요가 없다.

이런 대출은행업과는 달리 예금은행업은 예금자가 자신의 재산을 은행에 넘겨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은행은 예금자의 예금 전액을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은행은 고객의 예금 지급 요구에 응하기 위해 예금의 일부를 지급준비금으로 보관한다. 이것이 소위 부분지급준비제도다. 이 금액은 전체 예금의 1%보다 훨씬 적다.

문제는 부분지급준비제도가 예금은행업에서 재산의 정당성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A가 한 은행의 요구불예금에 100만원을 넣었다고 하자. 이 은행은 지급준비금으로 100만원의 1%인 1만원만 남겨두고 나머지 99만원을 B에게 빌려준다고 하자. 이때 99만원의 소유주는 A와 B 둘이 된다. 정당성을 따져보면 최초 예금자인 A가 99만원의 정당한 소유자이고 B는 정당한 소유자가 아니다.

B가 이 돈을 다시 다른 은행에 예금하면 은행은 또 그것을 기초로 또 다른 신용을 창출할 수 있다. 이 일이 무한정 계속된다고 가정하면 전체 은행은 최대 9900만원(100만원의 100배에서 100만원을 뺀 금액)까지 신용을 창출할 수 있다. 현실에서 전체 은행은 9900만원보다 적게 신용수단을 창출하는데 여러 가지─경기 변동이 가장 중요한─이유로 그 크기는 확대 또는 축소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서양에서는 19세기 초까지 대출은행업과 예금은행업이 엄격하게 구분됐다. 8~10세기 중국, 14~16세기 베네치아 등지에서 일시적으로 두 기능이 혼동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현대의 은행이 예금은행업을 대출은행업과 동일시하게 된 데는 서양 특히 영국의 사법체계가 한몫했다.

대출 또는 신용거래는 채권자가 화폐와 약속증서(IOU)를 바꾸는 것이다. 약속증서는 차용한 원리금을 미래의 정해진 날짜에 갚겠다고 서약한 증서를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금자가 은행에 한 예금은 결코 예금자가 은행에 대출한 것이 아니다. 예금은 귀중품(돈)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는 일종의 위탁(bailment)거래 또는 청구(claim)거래다. 위탁거래는 넓은 의미의 보관업에 속한다.

영국은 19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보관업에 관한 법률체계가 발달하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1811년 윌리엄 그랜트 판사는 앞에서 제시한 사례와 비슷한 소송인 ‘카 대 카’ 사건에서 예금자의 예금은 위탁이 아니라 은행의 부채와 같다고 판결했다. 1816년 ‘드베인스 대 노블’ 사건과 1848년 ‘폴리 대 힐’ 사건에서 영국 사법부는 이것을 재확인했다. 폴리 사건에서 카튼햄 판사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은행이 채무를 상환하지 않는 경우에도 이것은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 은행이 단지 합법적으로 지급 불능이 된 것이라고 판결했다. 한마디로 당시 영국 사법부 그리고 비슷한 사건에서 영국 판례를 참고한 미국 사법부는 위탁과 부채의 개념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부분지급준비제도가 확립됐고 세계 표준이 됐다.

예금자와 차용자가 동시에 같은 돈 또는 자금에 대해 배타적인 소유자가 될 수는 없다.

예금자의 예금을 기초로 창출한 신용은 ‘정당한 재산’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민간은행을 통제하는 정부가 부분지급준비제도를 허용함으로써 이런 일이 지속되고 있?

전용덕 < 대구대 무역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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