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윤선 기자 ] 최근 열린 한 중소기업인들의 모임에서였다. 원탁에 둘러앉은 중소기업 대표들은 처음엔 서로 어색한 듯 명함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일부 대기업 행태에 대한 얘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열띤 성토장으로 바뀌었다. 한 그룹의 여러 계열사에 장비를 납품하고 있다는 A업체의 김모 사장은 “앞으론 중국 업체에만 납품하고 싶다”며 울분을 토했다.
사정은 이랬다. 김 사장은 최근 신기술을 적용한 장비를 개발했다고 한다. 이를 한 대기업 그룹 계열사에 납품했다. 그 회사는 “유지 보수에 필요하다”며 설계도면을 요청했다. 김 사장은 별다른 의심 없이 도면을 넘겼다. 그러자 몇 달 뒤 경쟁사가 똑같은 제품을 훨씬 싼값에 생산해 납품했다고 한다. 그는 “대기업이 도면을 다른 협력 업체에 넘긴 것”이라며 분개했다.
“경쟁 업체도 같은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도면을 넘겼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김 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저희도 처음 개발하는 장비다 보니 불필요한 부분이 조금 포함됐어요. 나중에 경쟁사가 만든 것을 보니 그 불필요한 부분이 그대로 있더라고요. 스스로 개발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명백한 기술 유출이면 정식으로 항의하거나 고발하면 되지 않을까. 그는 “고발하는 그날로 영원히 거래가 끊긴다”고 손사래를 쳤다.
김 사장은 가격을 깎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힘들여 개발한 신기술이 그대로 도둑맞을 때는 정말 화가 난다고 했다. 둘러앉은 다른 사장들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 사장만 겪은 일 같지는 않았다.
김 사장은 “아주 큰 회사들은 괜찮은데 몇몇 그룹 계열사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대기업 계열사의 ‘작은 부정’이 중소기업엔 생사가 갈리는 문제가 된다는 게 이들의 토로다. 김 사장이 말한 것처럼 신기술을 개발한 중소기업들이 한국 업체를 외면하고 해외로 눈을 돌리면 그 자체로 기술 유출이 될 수 있다. 곁에 앉은 다른 사장은 “상생이라고 협력사에 돈 나눠주는 것보다는 공정한 입찰 환경만 자리 잡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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