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부산 명물 (2) 남선창고(南鮮倉庫)

입력 2016-03-15 17:34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부산 초량(草梁)은 왜관(倭館)이 있던 자리다. 17세기 숙종 대에 지어진 왜관은 10만평이 넘는 동북아 최대 중계 무역지였다.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약재나 서적 구리 등을 팔았고 조선은 비단과 인삼 쌀 등을 거래했다. 왜관에 장이 들어서는 날이면 3000명 이상의 조선인과 일본인이 모여들었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양과 무역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발빠른 일본 상인들은 시계 잡화 등 서양 물품도 시장에 내놓았다. 조선 조정에서도 필요한 물품을 이곳 왜관에서 구입했다. 임진왜란 이후 300년이 넘도록 조선과 일본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왜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20세기 초 한반도 물류의 상징이던 남선창고(南鮮倉庫)도 초량에 자리잡았다. 함경도의 명태와 강원도의 목재, 전라도의 곡물 등 온갖 물품이 해로를 통해 이곳에 모여들었다. 일본 제품도 이곳으로 몰려왔다. 창고의 가치는 엄청났다. 함경도에서 갖고 온 명태가 특히 많이 보관돼 명태고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냉동고가 없던 시절이라 바닥에 수로를 내 물기도 제거하고 기온도 서늘하게 유지했다. 이들 상품은 경부선 철도를 따라 전국 각지로 수송됐다. 초량 객주(客主)들이 주역이었다. 이들은 창고를 경영하면서 독립적인 상업 자본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다든지, 1920년대 조선인 학교를 짓는 등 문화 사업도 펼쳤다.

초량왜관이나 남선창고는 바다로 열린 부산의 상징이다. 부산 경제는 이런 기초가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최대 항구로 성장했다. 부산의 개방 정신은 6·25전쟁 이후 또 한 차례 힘을 발휘했다. 미군의 원조물자가 이곳에 몰려들면서 부산은 전시 하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이 됐다. 1950~1970년까지 한국 산업을 이끌던 섬유나 신발 고무 목재 등이 부산에서 커갔다. 한국 초기 산업화의 주역이던 동명목재나 경성방직 금성방직은 모두 부산에서 자라났다. 삼성의 첫 제조업체인 제일제당과 자동차의 효시 신진자동차 역시 출발은 부산이었다. 한국 경제 역사는 부산 경제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초량왜관이나 남선창고의 흔적을 지금은 찾기조차 어렵다. 초량왜관을 상징하는 표지석은 용두산 공원에 설치돼 있다. 남선창고 역시 2009년에 철거돼 지금은 붉은 벽돌담장만 남아있다고 한다. 오륙도와 태종대와 아름다운 해운대와 자갈치 어시장만 부산의 명물인 것은 아니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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