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블록에 쌓인 영욕의 84년…레고는 어떻게 부활했을까

입력 2016-03-17 18:23   수정 2016-03-18 05:04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

데이비드 로버트슨·빌 브린 지음/ 김태훈 옮김/ 해냄
380쪽/ 1만6800원

1990년대 중반 글로벌기업 성장
PC게임 나오며 위기 직면…교육·의류 사업은 줄줄이 실패

회생 시작은 "기본 돌아가자"…성인시장 개척하고 디지털 대응
21세기형 기업으로 재탄생




지구에 출현한 호모사피엔스의 30만년 역사에서 2016년 3월9일은 큰 분수령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어려운 게임으로 평가받는 바둑의 인간계 최고수 이세돌과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의 대결이 이뤄진 날이다.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과 맞붙은 인공지능의 고등추론에는 ‘어려운 문제는 쉽고, 쉬운 문제는 어렵다’는 모라벡의 역설이 존재한다. 인공지능으로 체스의 고수를 만들기는 쉽지만 지각과 이동능력에서 한 살짜리 어린이를 따라가기는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기업에 모라벡의 역설을 적용한다면 레고는 전형적 사례다. 레고의 주요 제품은 평범해 보이는 10가지 미만 기본 색상의 플라스틱 블록을 기본으로 하는 어린이용 장난감으로, 언뜻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따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레고의 특허도 1988년 종료되면서 누구나 유사품을 제작해 팔 수 있다. 장시간 앉아서 블록을 맞추는 놀이는 1980년대부터 등장한 비디오 게임의 역동적인 화면과 다양한 액션을 흉내내지 못한다.

하지만 레고는 특징이 없어 보이는 블록완구에서 경쟁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독특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 몇 가지 유형의 블록을 조립해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레고는 하드웨어 디바이스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에서 블록이나 모듈의 개념으로 적용되는 보통명사가 됐다.

데이비드 로버트슨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교수가 쓴 《레고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는 레고의 탄생과 성장, 위기를 분석해 모든 조직이 직면한 혁신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다. 레고의 역사를 통해 어떤 혁신이 성공하고, 실패하는지를 살펴본다.

1932년 창립 이후 오늘날까지 레고의 84년이 항상 좋았던 시절만은 아니었다. 덴마크 작은 마을 빌룬에서 나무 장난감을 제작하는 동네 목공소로 시작한 레고는 1946년 당시로선 혁신적 신소재인 플라스틱 블록으로 주요 제품을 전환한 뒤 1990년대 중반 세계에 45개의 법인을 거느리고 9000여명을 고용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사업환경이 급변했다. 어린이와 청소년층을 사로잡는 비디오 게임이 컴퓨터 보급과 함께 PC게임, 온라인 게임으로 확산되면서 전통적 아날로그 놀이기구의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레고는 다방면에서 적극적인 혁신에 나섰다.

창업자가 덴마크에 세워 인기를 끌던 놀이공원 레고랜드를 영국, 독일, 미국에 개장하고, 소매매장 300곳을 신설했다. 또 컴퓨터 게임용 소프트웨어, 교육사업, 아동복, 여아용 인형, 미디어사업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그러나 시대 흐름에 따라 추진한 신규 사업들은 실패했다. 2003년에는 매출이 30% 감소하고 유동성 위기에 몰리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는 신세가 됐다.

2003년 외부에서 구원투수로 영입돼 지금까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요르겐 비 크누스토르프는 과다한 혁신의 함정에 빠졌던 1990년대를 “강력한 핵심사업을 보유한 회사의 경우 5년마다 하나의 인접분야로 진입할 수 있는데, 레고는 매년 5개의 유관 사업을 벌였다. 잘 모르는 사업을 갑자기 운영할 역량도 없었다”고 평가한다.

또 “레고에 와 보니 평생 이렇게 엉망인 회사는 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 정상이 아니어서 돈을 못 벌고 매출조차 예상하지 못하는데 직원들은 정말 행복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사업 전반이 나락에 떨어지면서 무너지고 있던 1990년대 말에도 레고는 ‘덴마크 기업인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으로 꼽혔고, 2000년 경영월간지 포천과 영국장난감유통협회가 레고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장난감’으로 선정한 것도 직원들을 착각 속에 살게 하는 데 한몫했다.

크누스토르프가 주도한 레고 회생의 출발점은 ‘기본으로 돌아가자’였다. ‘꿈은 크고 막연한 자부심에 말은 많으면서 행동은 굼뜨지만 직원은 행복한’ 곪은 조직을 ‘현실을 직시하고, 운영과 실행에 무게를 두고 성과를 내는’ 건강한 조직으로 변화시켜나갔다. 10여년에 걸친 회생과정은 레고 1.0(생존을 위한 비상착륙), 2.0(핵심자산인 블록에 집중하는 방향설정), 3.0(혁신매트릭스를 활용한 성장동력 회복), 4.0(성장을 위한 개방적 혁신), 5.0(업계선도자의 위치 회복과 성장플랫폼 확충)의 5단계로 진행됐다.

크누스토르프는 1.0단계에서 1200명 해고, 생산성 낮은 공장 폐쇄, 낮은 수익성 제품라인 철수, 불용자산의 신속한 매각 등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레고의 핵심역량을 재정의하고 경쟁력을 회복한 2.0 단계 이후부터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인 오픈 이노베이션, 크라우드 소싱을 접목해 아날로그의 정체성과 디지털의 첨단기술을 효과적으로 융합했다. 레고로봇을 출시하고 성인용 장난감 시장을 개척하는 등 디지털 시대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레고를 21세기형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이런 회생과정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과거에서 훔친 자산으로 미래를 해석했다”고 표현한다.

한때의 영화를 뒤로 하고 생사의 기로에 섰다 회생한 레고의 드라마는 조직 전체가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기본으로 돌아가 핵심경쟁력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1990년대 후반 레고의 위기는 오늘날 한국 기업들이 처한 상황과 ‘데자뷔’(기시감)가 느껴질 정도로 비슷하다.

레고의 부활과 재도약의 과정이 우리에게 생생한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이 공감할 수 있다.

김경준 < 딜로이트컨설팅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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