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잊힐 권리' 법제화] "인터넷 주홍글씨 지워달라" 법으로 보호…'알 권리' 침해 논란도

입력 2016-03-25 18:56  

방통위, 가이드라인 마련

본인·유가족 요청하면 관리자가 '블라인드 처리'
의료사고 기록 등은 삭제 못해…공공이익 우선



[ 안정락 기자 ] 경남 지역의 한 여성 경찰관은 12년 전 고등학생 시절 올린 인터넷 글 때문에 수난을 겪고 있다. 당시 밀양지역에서 발생한 집단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한 학생 미니홈피에 무심코 남긴 글이 인터넷을 통해 다시 알려지면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경찰관이 될 수 있느냐”며 비난을 받아야 했다. 직장인 김모씨(31)는 헤어진 남자친구와 호기심에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유포돼 고통을 겪고 있다. 김씨는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가 볼까봐 사진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해당 사이트에서 탈퇴한 상태라 게시물을 지울 권한이 없다.

이처럼 남기고 싶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지울 수 있는 권리를 뜻하는 이른바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가 국내에서도 본격화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25일 법제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안)을 발표하면서 관련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첫 가이드라인 나와

방통위는 이용자 본인이 작성한 과거 게시물(글, 사진, 동영상 등)을 본인이 삭제할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게시판 관리자에게 글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잊힐 권리)’을 제도화하기로 했다. 본인이 사망한 경우엔 특정 지정인이나 유족 등이 글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

잊힐 권리의 보장은 과거 인터넷에 올린 글이나 사진, 동영상 등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게시판 관리자는 요청인 본인의 게시물로 확인되면 ‘블라인드 처리’ 등의 방식으로 곧바로 게시물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만약 거짓 요청으로 인해 게시물을 지웠을 경우엔 이를 원상회복할 수 있는 절차도 마련했다. 게시물을 완전히 삭제하지 않고 블라인드 처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공익적 목적이나 다른 법률 등에 의해 삭제가 금지된 글은 본인이 요청해도 예외적으로 관리자가 블라인드 처리를 거부할 수 있다.

잊힐 권리에 대한 논의는 2014년 5월 유럽사법재판소(ECJ)의 한 판결로부터 촉발됐다. 당시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곤살레스는 구글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과거에 빚 때문에 집이 경매에 부쳐진 내용이 담긴 기사가 구글에서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다”며 “검색 결과를 지우라”고 판결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2개월간 8만건 이상의 포털 게시글 삭제 요청이 쇄도했다. 국내에서도 방통위를 중심으로 법제화 움직임이 시작됐고 이번에 첫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이 2012년 대학생 19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81%가 ‘잊힐 권리’ 입법에 찬성했다.

◆잊힐 권리 vs 알 권리

잊힐 권리를 폭넓게 보장해주면 공공의 ‘알 권리’가 훼손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과거 서울의 한 병원이 “네이버 다음 등 포털에서 병원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의료사고’가 뜬다”며 “이를 없애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포털 측은 이를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KISO)에 심의를 맡겼다. 결국 KISO는 “해당 검색어는 국민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기관에서 불의의 사고와 관련된 것으로 공공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다”며 “이를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결정했다.

KISO는 공공의 이익 등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국민의 알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운영 세칙을 마련해 두고 있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잊힐 권리의 지나친 확대 적용은 언론의 표현 자유, 알 권리 등과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며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잊힐 권리에 대한 논쟁은 사망한 사람에 대한 ‘디지털 유산’의 논의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망한 사람의 인터넷 계정 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KISO가 인터넷 이용자 511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공개 콘텐츠’를 가족 또는 친구에게 남겨주고 싶다는 응답은 76%에 달했다. 하지만 ‘비공개 콘텐츠’를 가족에게 공개하고 싶다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안정락 기자 jr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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