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공부] 나라를 빼앗긴 뒤 '되찾자 운동' 시작…신문발행·국채보상 계몽운동 '역부족'

입력 2016-04-01 16:52  

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13)



1910년 8월29일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선포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15일, 전쟁에 패배한 일본이 물러갈 때까지 36년 동안을 일제강점기라고 합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점령한 시기’라는 뜻입니다. ‘제국주의’는 한마디로 자기네 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여기고 그 밑에 여러 식민 국가를 거느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가지려던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로부터 자원과 노동력을 거의 공짜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국력 안 키운 잘못…경제이권 빼앗겨

조선이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때까지 여러 힘센 나라가 한반도에서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일본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은 철도를 놓을 수 있는 권리, 광산에서 금 등을 캘 수 있는 권리, 산에서 나무를 베어갈 수 있는 권리 등 돈이 될 만한 권리는 앞다퉈 차지했습니다. 그중 철도 부설권은 빼앗은 자원을 자기네 나라로 싣고 가기 편하게 길을 놓는 아주 중요한 권리였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런 권리를 인정하려면 조약을 맺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때 조선(대한제국)이 맺는 조약에는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최혜국 대우는 어떤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라도 뒤에 다른 나라에 인정한 내용은 앞서 맺은 나라에도 인정해야 한다는, 억지나 다름없는 대우입니다. 이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인 조항이지요. 힘이 없던 조선은 이런저런 불합리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거의 모든 이권을 힘센 나라들에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을 국민이 그냥 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권리를 되찾자는 여러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국권 회복 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의병 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 계몽 운동 혹은 실력 양성 운동입니다.

국권 회복을 위한 의병 활동은 1907년 군대가 강제로 해산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의병은 일본군과 맞서 치열하게 싸웠지요. 그런데 일본은 의병 부대를 잔혹하게 무찌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병의 가족까지 무참히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더 이상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었던 의병들은 중국 만주로 건너가 무장 독립군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뒤늦은 신교육 계몽운동

애국 계몽 운동과 실력 양성 운동은 국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신교육 운동, 언론 계몽 운동, 국채 보상 운동, 국학 운동, 민족 종교 운동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신교육 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은 국민에게 근대 교육을 하기 위해 전국에 5000여개의 사립학교를 세웠습니다. 또 국어와 국사 교육에 힘을 쏟자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국어학자 주시경은 국민을 계몽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면 국어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채호와 박은식 등에 의해 근대 사학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황성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도 속속 발간되었지요. 이 신문들은 국민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리고 나라와 민족, 그리고 더 큰 세상까지 내다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갖도록 독려했습니다. 또 종교계에서는 일본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민족 종교 운동을 펼쳤습니다. 동학에서 시작된 천도교, 단군교에서 시작된 대종교는 종교 운동을 항일 운동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이런 운동들을 방해했습니다. 1908년 사립학교령을 내려 신교육 운동을 규제했고 1909년에는 출판법을 제정하여 나라 사랑을 강조한 책들을 압수하고 원고는 검열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애국 계몽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안창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세계의 모범 민족, 일등 국민으로 만들고자 노력했지요. 안창호는, 비밀 결사 조직 신민회를 통해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 등을 운영하면서 항일·계몽 운동을 펼쳤습니다. 신민회는 1910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일본 방해로 국채보상운동 흐지부지

일본에 진 나랏빚을 갚아 국권을 되찾자는 움직임도 일었습니다. 바로 국채 보상 운동입니다. 1907년부터 1년에 걸쳐 펼쳐진 이 운동의 핵심은 담배를 끊자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진 빚을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서 마련한 돈으로 갚자는 취지였지요. 모금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져 전 국민이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국채 보상 운동도 일본의 방해로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이 운동의 중심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베델 사장과 양기탁이 성금을 멋대로 사용했다고 거짓으로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베델은 추방되고 양기탁은 구속되었습니다. 재판에서 양기탁이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는 이미 국채 보상 운동의 열기가 사그라진 뒤였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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