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듯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
[ 양병훈 기자 ] “회사 생활을 5년 넘게 했건만 남은 것이라고는 500만원짜리 통장 하나와 머릿속에서 러시아어가 송두리째 증발해버리면서 남긴 구멍뿐이었다(동미의 대학 전공이 러시아어였다).”
스물아홉 살 동미가 깨달은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다. 앞으로 나아지리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제 밥벌이 하나 못하는 집구석의 껌딱지 같은 존재. 자괴감에 짓눌려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그는 마지막 탈출을 결심한다. 주인공 동미가 집을 나간 이유다.
한국경제신문사의 올해 청년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 당선작 집 떠나 집(은행나무)이 출간됐다. 취업난과 단편적 인간관계에 치이는 이 시대 청년의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작품이다. 소설을 쓴 하유지 씨(33·사진)는 “큰 서사적 사건이 아니라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과 사건이 소설의 배경”이라며 “일상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관찰한 게 내 안에 쌓여있다가 소설로 나왔다”고 말했다.
동미는 회사와 집만 왔다갔다 하는 삶이 싫어 사표를 낸다. 재취업에 열을 올렸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가족 눈치에 밀려 집안일 전담을 자처한다. 그렇게 아홉 달을 보내고 나니 밖에 나가면 ‘아가씨’도 ‘새댁’도 아니고 ‘어머니’ 소리를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거칠어진 손, 굽은 허리, 흐리멍덩한 눈, 부스스한 머리, 구겨진 자존심…. 동미는 어디로 갈지도 정하지도 않고 무작정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선 동미가 탄 건 비행기도 기차도 아니라 마을버스다. 수중에는 옷가지 몇 벌과 저금 500만원이 전부라 멀리 갈 형편도 못 된다. 옆 동네에 방을 얻은 동미는 우연히 골목 어귀의 찻집 ‘모퉁이’에서 일하게 된다. 그 옆에 붙은 식당 ‘만나’의 일도 틈틈이 돕는다. 손바닥만 한 두 가게가 소설의 배경 대부분이다. 상처받고 방황하던 청춘들이 모여 서로를 위로하는 안식처 같은 곳이다.
모퉁이의 주인 봉수는 한때 노숙자 생활을 했다. 모퉁이에서 일하는 나리는 엄마를 갑자기 하늘로 떠나보낸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만나의 주인 리경은 자기 잘못으로 전 남자친구가 다리를 잃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들 가게에 채소를 배달하는 선호는 전 여자친구가 자신의 공모전 아이디어를 훔쳐 다른 남자에게 준 쓰라린 기억이 있다. 이 밖에도 방황하는 수많은 청춘이 가게를 스쳐 간다.
이들은 서로를 어루만지고 부대끼며 점점 상대에게 마음을 연다. 이성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짙은 외로 遲?떼어낸다. 이 모든 과정은 수채화처럼 조용히 전개된다. 주인공을 각성시킬 만한 큰 사건은 없지만 그래서 오히려 공감이 간다.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하씨는 이 소설에 자전적 성격이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대학 졸업 뒤 직장생활을 했으나 지나치게 빡빡한 생활에 회의를 느껴 스물아홉 되던 해 사표를 냈다. 하씨는 “퇴사하고 한동안 집에서만 지냈는데 점점 게을러진다는 생각이 들어 카페와 도서관을 출퇴근하듯이 다녔다”며 “그때 경험한 일이나 카페에서 옆 사람 얘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상상하던 걸 소설 소재로 삼았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 각 장면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한 점도 눈에 띈다. 등장인물이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면을 두고 “손을 접고 집게손가락 하나만을 펴서, 반쯤 열린 뒷문 밖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장면을 상상한 뒤 그걸 말로 설명한다는 생각으로 쓴 부분이 많다는 게 하씨의 얘기다.
그는 “묘사를 잘해놓은 소설책을 보며 본받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독자들도 책 속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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