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전형
캐나다 출장갔다 자동차금융 배워…트럭 대출 회사 차려 대박
중국 정부의 끝없는 견제
자동차금융·사찰 건설업 등
리 회장이 개척해서 성공하면 정부 뒤늦게 뛰어들어 쫓아내
"중국은 이제 금융 시대"
온라인금융 플랫폼 잇따라 공개
올해 1000억위안 결제 목표…"바이두·알리바바 두렵지 않다"
[ 이상은 기자 ]
중국 허베이(河北)성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245m짜리 카이위안(開元) 파이낸스센터다. 카이위안은 트럭 등 자동차를 사거나 차량 수리비 등을 빌려주는 자동차금융 전문회사다. 영어 이름은 핀세라(Fincera)다. 2014년엔 매출이 8억1300만달러에 이르렀다.
카이위안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리융후이(李勇會) 회장은 문화혁명 이후 대기근 시기에 태어나 중국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부를 키웠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범한 배경에서 태어나 중국 정부와 국유기업의 견제를 딛고 자수성가한 ‘중국 사업가’의 전형과 같은 인물로 그를 소개하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척박한 中 금융업에 진출해 대박
1950년대 말 문화혁명 이후 중국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1958~1961년 최소 3600만명이 굶어죽었다.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사에 매달리는 사람이 늘었다.
1962년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石家莊)에서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리 회장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 교사직을 버리고 농부가 됐다. 매일 먹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리 회장은 “그런 삶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은 가난했지만 교육열이 아주 높았다. 그의 형제자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5명이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 빈곤층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리 회장은 톈진대에 갔고, 물리광학을 전공했다. 1985년 졸업한 뒤 10년간 국영 트랙터회사에서 일했다. 한 달 월급이 40위안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는 가족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1994년 캐나다에 출장을 간 그는 캐나다에선 집이나 차를 살 때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린 다음 순차적으로 갚는 것을 알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을 쓰기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만 해도 집, 특히 차를 살 때 금융을 활용하는 문화는 없었다.
귀국해서 트럭을 빌려주는 회사(카이위안 오토트레이드)를 차렸다. 리 회장은 “트럭에 대한 강한 수요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능력이 없었다”며 “트럭 만드는 자동차 회사들은 나한테 ‘더 많이 팔 수만 있다면 돈은 나중에 내도 된다’
캐나다 출장갔다 자동차금융 배워…트럭 대출 회사 차려 대박
중국 정부의 끝없는 견제
자동차금융·사찰 건설업 등
리 회장이 개척해서 성공하면 정부 뒤늦게 뛰어들어 쫓아내
"중국은 이제 금융 시대"
온라인금융 플랫폼 잇따라 공개
올해 1000억위안 결제 목표…"바이두·알리바바 두렵지 않다"
[ 이상은 기자 ]
중국 허베이(河北)성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245m짜리 카이위안(開元) 파이낸스센터다. 카이위안은 트럭 등 자동차를 사거나 차량 수리비 등을 빌려주는 자동차금융 전문회사다. 영어 이름은 핀세라(Fincera)다. 2014년엔 매출이 8억1300만달러에 이르렀다.
카이위안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리융후이(李勇會) 회장은 문화혁명 이후 대기근 시기에 태어나 중국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부를 키웠다. 영국의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평범한 배경에서 태어나 중국 정부와 국유기업의 견제를 딛고 자수성가한 ‘중국 사업가’의 전형과 같은 인물로 그를 소개하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했다.
척박한 中 금융업에 진출해 대박
1950년대 말 문화혁명 이후 중국은 심각한 기근에 시달렸다. 1958~1961년 최소 3600만명이 굶어죽었다.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농사에 매달리는 사람이 늘었다.
1962년 허베이성 성도인 스자좡(石家莊)에서 여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리 회장의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다. 교사직을 버리고 농부가 됐다. 매일 먹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리 회장은 “그런 삶밖에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부친은 가난했지만 교육열이 아주 높았다. 그의 형제자매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한 5명이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 빈곤층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리 회장은 톈진대에 갔고, 물리광학을 전공했다. 1985년 졸업한 뒤 10년간 국영 트랙터회사에서 일했다. 한 달 월급이 40위안에 불과했다. “그 돈으로는 가족을 먹여살릴 수도 없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1994년 캐나다에 출장을 간 그는 캐나다에선 집이나 차를 살 때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린 다음 순차적으로 갚는 것을 알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1978년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정책을 쓰기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당시만 해도 집, 특히 차를 살 때 금융을 활용하는 문화는 없었다.
귀국해서 트럭을 빌려주는 회사(카이위안 오토트레이드)를 차렸다. 리 회장은 “트럭에 대한 강한 수요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능력이 없었다”며 “트럭 만드는 자동차 회사들은 나한테 ‘더 많이 팔 수만 있다면 돈은 나중에 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