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이공계 전성시대?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2016-04-07 18:57  

엔지니어들의 한국사

한경희·게리 리 다우니 지음
김아림 옮김 / 휴머니스트 / 288쪽 / 1만8000원



[ 김희경 기자 ]
2002년 4월21일 ‘과학의 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KOFST)는 ‘과학기술의 위기’를 선언했다. 이들 단체는 “과학기술이 나라의 살길이라고 목청을 높이면서도 정작 사람을 키우고 대접받는 사회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산업화의 주역으로 꼽히던 엔지니어 직군은 당시 외면받고 있었다. 이공계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점차 줄어들었고, 많은 공학도가 자퇴서를 내고 의대와 한의대로 향했다.

14년이 지난 현재, 상황은 또 급변했다. ‘이공계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공계 출신 인재들은 각 기관과 기업에서 환영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많은 사람이 우려한 과학기술과 엔지니어의 위기는 끝난 것일까.

《엔지니어들의 한국사》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엔지니어의 위상과 현실을 다룬다. 엔지니어의 모습을 통해 한국의 자화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도 제시한다. 한경희 연세대 공과대 교수는 게리 리 다우니 미국 버지니아공대 과학기술학과 석학교수와 함께 책을 공동 집필했다.

저자들은 정치·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엔지니어의 시각에서 한국사를 되짚어본다. 치열했던 한국사 속엔 정치인과 경영인 등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조선 시대부터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술을 연구하는 엔지니어들도 있었다. 다우니 교수는 “공학과 엔지니어는 국가 안에서 성장하는 동시에 엔지니어의 정체성과 이상은 시대에 따라 극적으로 다변화한다”며 “이런 관점에서 그들의 삶과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엔지니어 이야기는 다산 정약용부터 시작된다. 다산은 거중기 등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술 수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중국에선 기계를 제작하는 새로운 방법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우리는 해묵은 낡은 방법만 편하게 여기고 있다”고 탄식했다. 이렇게 이 땅에서 기술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다.

엔지니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60~1970년대다. 박정희 정부 시절 엔지니어는 산업화와 수출을 위한 기술 개발에 힘쓴다. 저자들은 이때를 엔지니어의 전성시대로 본다. 1990년대 민주화가 가속화하면서 정부 주도의 사업들이 민간으로 이전한다. 이 시기에 엔지니어는 국가 발전을 이끈 주역이라는 상징성을 잃게 된다. 이후 1997년엔 외환위기가 찾아오고, 엔지니어는 대규모 실업 사태까지 겪는다.

역사는 돌고 돌아, 이공계와 엔지니어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저자들은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교수는 “(이공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경제난과 취업난으로 인한 것”이라며 “진정한 의미의 엔지니어를 양성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엔지니어에게 여전히 ‘헝그리 정신’을 요구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2004년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웹사이트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헝그리 정신으로 밤낮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엔지니어의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적절한 대접이 뒤따르지 않는 직업에 열정을 바칠 사람은 별로 없다.” 저자들도 헝그리 정신이 과거 국가 발전의 영광을 재현해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한 교수는 “열정과 부지런함의 상징이던 그들은 이제 일과 삶, 개인과 공동체 등 다른 차원의 연결 고리를 마련하고 싶어 한다”며 “산업화의 기억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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