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2020년까지 ‘동전 없는 사회’라는 화두를 던졌다. 1원, 5원, 10원짜리 동전은 땅에 떨어져도 줍지 않는다. 50원, 100원 동전도 귀찮기만 하다. 동전을 찍어내야 하는 한은으로선 충분히 제안해 봄직한 아젠다다.
그러나 ‘동전 없는 사회’에 앞서 생각해 볼 과제가 있다. 화폐 액면단위 절하, 즉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다. 돈의 실질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가만 1000원을 1원(또는 1환)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굳이 ‘동전 없는 사회’를 애써 연구할 이유도 없다.
한은이 리디노미네이션을 검토한 지 15년이 흘렀다. 지난해 국감에서 이주열 한은 총재는 “경제 규모에 비해 (화폐) 숫자 크기가 너무 크다”는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기획재정부는 펄쩍 뛰고 한은도 ‘절대 아님’이란 희한한 해명자료를 냈다. 국민은 담담한데 정부·한은이 지레 겁부터 집어먹은 꼴이다.
국민은 담담한데 정부 지레 겁먹어
일상에서는 이미 리디노미네이션이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3500원짜리 커피를 ‘3.5’로 표기하는 식이다. 젊은 층은 이런 가격 표시를 선호한다. 오히려 천문학에나 쓰던 1경(京)이 공식 통계에 등장한 게 더 황당하다. 1경은 10,000,000,000,000,000이다. 0이 16개다. 또한 기업 재무제표는 작성도, 이용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2000년대 들어 유로화가 등장했고 터키와 루마니아까지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했다. OECD 국가 중에 네 자릿수 환율은 한국뿐이다. 1달러가 1150원, 1유로가 1300원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誌)가 ‘한국은 조만간 괴이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지적할 만하다. 이런 후진적 화폐단위를 둔 채 ‘원화 국제화’ 운운하는 것은 난센스다.
물론 부작용도 있을 것이다. 흔히 물가 상승과 경제 혼란 가능성을 꼽는다. 하지만 1000원이 1원이 된다고 물가가 뛰고 부동산 투기가 벌어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터키는 2005년 100만 대 1로 절하했어도 물가가 1% 오르는 정도였다. 지금은 인플레가 아니라 디플레가 걱정 아닌가. 가뜩이나 성장률 추락에 구조조정까지 겹쳐 탈출구가 안 보이는데, 소비 자극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화폐 교체, 은행 시스템 조정, 기업 회계 변경 등에 드는 비용은 국민 편익을 고려하면 새발의 피다.
인플레는 기우…소비 자극 기대
그럼에도 정부가 펄쩍 뛰는 것은 54년 전 화폐개혁의 불편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2년 긴급조치로 예금을 동결하고 신권 교환도 금액을 제한했다. 자칫 박근혜 정부의 지하경제 양성화 공약과 결합해 연상작용을 일으킬까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그런 화폐개혁이 아니다. 예금을 정지시킬 이유가 없다. 신·구권을 2~3년간 무제한 교환해 주면 국민이 불편하거나 불안할 것도 없다. 마늘밭 5만원권 다발 같은 ‘구린 돈’이나 문제일 뿐이다.
이왕이면 화폐 도안도 원점에서 재검토하자. 지폐 인물이 왜 조선조 이씨 남성과 신사임당밖에 없나. 광개토왕도 있고, 강감찬도 있고, 다산도 있다. 인물 고증이 어렵다면 아름다운 강산이나 문화유산을 담으면 어떨까.
리디노미네이션을 당장 하자는 건 아니다. 이주열 총재가 전제로 깔았듯이 국민 공감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라도 한은 발권력을 동원하는 부도덕한 양적 완화보다는 리디노미네이션이 백번 낫다. 마냥 미룰 이유가 없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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