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도쿄 대공습

입력 2016-05-12 18:02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 고두현 기자 ]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9일 밤. 일본 라디오 방송이 미군 폭격기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경고했다.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제도부터 점점이 이어진 섬의 정찰병들이 적기 출현을 중계했지만 시민들은 긴가민가했다. 그동안 폭격이 시 외곽 군수공장에 국한됐고 일본 상공의 제트기류 때문에 폭탄 명중률도 낮았기에 더 그랬다.

일부 시민은 폭격을 구경하러 건물 옥상이나 뒷산으로 향했다. 대본영 전쟁광들이 내보내는 거짓 방송에 젖어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밤 12시 직전 미군 1번기가 저공으로 시내를 가로지르며 30l㎏짜리 소이탄을 쏟아부었다. 거대한 화염이 도시를 직선으로 갈랐다. 곧이어 2번기가 대각선으로 지나갔다.

이 ‘불의 X자’를 표식으로 폭격기 344대가 100만발 이상의 폭탄세례를 안겼다. 불기둥이 30m 높이까지 치솟았다. 강력한 화염폭풍이 온 도시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공습으로 10만여명이 즉사했다. 프랑스 기자가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19만여명이나 됐다. 앞서 이오지마 전투나 동남아 전장의 패배 소식만 해도 남의 일처럼 여기던 일본인들은 비로소 전쟁을 실감했다. 공교롭게도 중일전쟁 때 일본군의 중국 도시 폭격 방법과 같은 것이었다. 다음날 나고야를 비롯해 13일 오사카, 16일 고베, 19일 나고야 재공습도 마찬가지였다.

주요 도시가 모두 잿더미로 변하는데도 대본영은 허황한 꿈을 버리지 않았다. ‘1억 옥쇄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전 국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옥처럼 부서질 각오로 싸우거나 자결하라는 요구에 오키나와에서만 12만여명이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

미국으로서도 미칠 노릇이었다. 본토에서 전투를 치르면 미군 사상자만 수십만명에 이를 게 불 보듯 뻔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전쟁을 일찍 끝내야 민간인과 병사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일본 군부는 막무가내였다.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뒤에야 전쟁은 끝났다.

이런 와중에 소련 공산군은 만주를 넘어 남쪽으로 진군했다. 일본 패망이 늦어졌다면 한반도가 소련 손에 들어갈 판이었다. 도쿄 대공습과 원폭 투하는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더 큰 희생을 줄인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두고 ‘피해자 코스프레’에 급급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겐 이 또한 믿고 싶지 않은 그들만의 ‘흑역사’이겠지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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