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불란 북한 vs 지리멸렬 남한
김일성 등이 소련의 지령을 받아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만들고 있을 때 남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남한에서는 통일 정부를 기대하며 우익과 좌익이 서로의 주장을 지켜내기 위해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이 남한에 들어왔습니다. 해방된 지 23일 만이었지요. 남한에 들어온 미군이 할 일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남한에는 이미 많은 정치 단체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그만큼 해방 조국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우리 민족의 열망이 컸던 것입니다.
가장 먼저 구성된 단체는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였습니다. 9월 3일에는 박헌영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처음 건준에는 좌익과 우익 성향의 민족주의자가 고르게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산당 세력이 건준의 지도부를 손에 넣게 되었지요.
좌익 성향을 띠게 된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라는 정부를 세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여운 ? 김구, 김규식, 조만식 등 당시 이름을 날리던 인물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혔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지요. 인공은 법적인 절차에 따라 공개적으로 조직된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공은 단지 좌익이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세운 정치 단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군은 9월 9일 조선총독부 건물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을 열었습니다. 이때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될 때까지 3년 동안 미군은 남한에서 군정을 실시하였지요. 미 군정은 남한에 있는 정치 단체 중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인공은 물론 중국에서 독립 운동을 한 임시정부도 망명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한 사람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자신의 이념과 주장을 펼칠 수 있도록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정당이 생겨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지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1945년 10월, 미국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귀국했습니다. 당시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할 때 연합국인 소련을 계속 비난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조르며 미국을 괴롭게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미 군정과 도쿄의 연합군 사령부는 이승만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이승만은 귀국할 때부터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유명한 말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지요. 하지만 이승만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미 군정과 연합군 사령부는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 이승만 같은 영향력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미 군정은 임시정부의 귀국에도 협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승만보다 한 달 늦은 11월에야 해방 조국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45년 12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는 미국, 소련, 영국 등 세 나라 외무 장관이 모인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를 모스크바 삼상회의라고 하지요. 이 회의 결과 “코리아인을 위한 민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그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군과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설립한다, 공동위원회는 제안을 준비하는 데 코리아의 민주 정당·사회 단체들과 협의한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코리아의 임시 정부와 협의한 후 코리아의 4개국 신탁 통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미국·소련·영국·중국의 공동 회의에 회부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모스크바 협정이 발표되었습니다.
신탁통치로 기운 북한
5년 동안 한반도를 신탁 통치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우익들이 입을 모아 반대하였습니다. 신탁 통치란 한반도가 스스로 다스릴 능력을 갖출 때까지 승전국들이 대신 통치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우익들은 신탁 통치를 미개한 민족에게나 시행하는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좌익들은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지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소련의 지시를 받고 찬성으로 돌아선 것입니다.
신탁 통치 반대(반탁)다, 찬성(찬탁)이다 하여 나라 안이 온통 들끓던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모스크바협정에 따라 한반도에 민주적 임시정부를 세우는 일을 협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입니다. 그래서 3000만 우리 국민의 눈과 귀가 일제히 이 회의에 쏠렸지요.
하지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주요 의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회의도 못 해보고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습니다. 모스크바 협정에 담긴 ‘민주 정당·사회 단체’를 선정하는 데 ‘민주’라는 말의 해석을 두고 미국과 소련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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