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전세'로 본 중산층 경제학

입력 2016-06-05 17:54  

김용환 < NH농협금융지주 회장 yong1148@nonghyup.com >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프랑스인이 평소 운동과 음악을 즐기며 자신만의 특별한 요리 레시피 하나 정도 가지고 있다면 아마 본인이 중산층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만약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한다면, “내가 사는 아파트가 몇 평이고 월평균 소득은 얼마나 되지?” 하고 반문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주택 보유 여부가 중산층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길목에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세제도가 있다.

최근 들어 국내 임대시장은 1인 가구 증가, 전세가격 상승 등에 따른 영향으로 전세에서 월세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임대시장의 구조 변화 과정에서 종종 전세제도의 후진성 논의가 제기되곤 한다. 심지어는 전세제도가 조만간 사라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는 전세제도는 금융접근성이 취약하던 시절에 일반 서민이 ‘월세-전세-주택보유’로 이어지는 사다리금융을 통해 자산을 불려나가는 매우 효과적인 금융수단이었다. 전통적 전세제도는 순자산이 임금 상승에 따라 증식되는 자산보전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가계의 잉여소득을 장기 연금방식으로 적립해 전세보증금을 규모화하고, 주택을 보유하면서 생애주기가 종료되는 주택금융의 특성이 있다.

자금 운용 측면에서도 전세제도는 고도로 선진화된 금융기법이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재정 거래의 원천으로 이용해 시장금리 수준의 운용수익을 추구할 수 있다. 반면 임차인은 보증금의 기회비용을 거주비용으로 내고 약간의 레버리지(은행차입 등)를 더해 미래의 주택구매력을 높일 수 있다. 이처럼 전세제도는 스스로 주택담보대출을 구조화하는 파생금융의 특성도 지니고 있다.

최근의 금융위기 이후 ‘전세의 부채화 과정(leveraging process)’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보증금의 형질이 가계 순자산에서 금융부채로 변질되고 있다. 전세보증금의 차입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자가(自家) 보유가 오히려 가계의 부채건전성을 악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전세 자산을 통한 가계의 부채 흡수 여력이 소진되고 있다는 의미다.

금리 상승 시 전세 버블 우려가 커지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전세 레버리지가 증가하면서 중산층의 진입장벽도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새삼 우리 부모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전세경제학이 그리워진다.

김용환 < NH농협금융지주 회장 yong1148@nonghyup.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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