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종서 / 뉴욕=이심기 기자 ]
지난달 24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결정은 영국과 유럽대륙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를 격랑으로 몰아넣었다. 패닉에 빠진 글로벌 증시가 폭락하고 주요 통화는 요동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글로벌 시장의 공포는 잦아들었지만 브렉시트 찬반투표 이후 영국 지도부 내 상황은 반전을 거듭하며 혼란스럽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후임 자리를 놓고 탈퇴파 간 정치적 음모와 배신이 교차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브렉시트를 뒷수습할 것으로 유력시되는 영국 여성 정치인 세 명이 주목받고 있다. 앞으로 영국과 탈퇴 협상을 주도할 EU의 실질적 수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여성이다.
(1) 영국 보수당, 배신의 결과는
'30년 우정' 캐머런·존슨·고브, 英 총리 자리 놓고 비정한 싸움
브렉시트를 막지 못했다며 사의를 밝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의 빈자리 쟁탈전이 점입가경이다. 권력 ?잡기 위해 30년지기 친구에게 등을 돌리고, 그 자신이 다시 최측근에게 배신당했다.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대사로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줄리어스 시저’까지 동원해 묘사되는 암투로 비치고 있다.
주인공은 영국 보수당 소속의 캐머런 총리,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이다. 이들은 영국 명문사립 옥스퍼드대 동문이자 30여년간 우정을 쌓아왔기에 브렉시트를 계기로 물고 물리는 정치게임은 더욱 이목을 끈다.
유대 고리를 먼저 끊은 것은 존슨 전 런던시장이다. 존슨은 영국의 유럽연합(EU) 잔류를 주장한 캐머런 총리에 맞서 브렉시트 찬성 캠페인 전면에 나섰다. 그는 당초 브렉시트에 회의적이었지만 캐머런을 끌어내리려고 적극 탈퇴로 승부수를 띄웠다는 분석이다.
존슨이 브렉시트로 캐머런의 사의를 이끌어내고 차기 총리 ‘0순위’로 오른 것까진 좋았다. 그는 탈퇴파 동지인 고브 법무장관에게 일격을 맞고 30일 총리 출마를 접었다. 브렉시트를 주도한 인물로 부각돼 정치적 부담에 짓눌려 ‘일보 후퇴’한 전략일 수도 있지만 고브가 총리직 출마를 전격 발표한 것이다.
고브는 브렉시트 캠페인 기간에 수차례 존슨의 총리 지명을 지지한다고 밝혀왔다. 그런 그가 총리후보 등록 마감을 하루 앞두고 “존슨은 국정을 장악하고 국민의 지지를 받을 후보가 아니다”고 공격하며 출마했다.
(2) 브렉시트 소방수는 여성?
메이 英 내무, 총리 후보 1순위…이글, 노동당 대표 출마 준비
브렉시트 여파로 공석이 되는 차기 총리 자리를 貂?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을 대신해 등판한 마이클 고브 법무장관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관에 입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은 테리사 메이 내무장관(59)이다. 영국 여론조사회사 유고브가 보수당 지지자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메이 장관이 31%로 1위를 차지했다.
옥스퍼드대 출신인 메이 장관은 6년째 내무장관으로 일해왔으며 이민과 치안, 사이버안보 분야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여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1979~1990년 재임)와 자주 비교된다. 메이 장관은 총리 입후보 출사표에서 “국가를 이끌 최선의 사람은 나라고 생각한다”며 “유럽연합(EU)과의 협상에서 영국 기업의 시장 접근권을 보장받고 이민자 통제권을 우선적으로 되찾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메이 장관이 명확한 계획과 신중한 일 처리로 브렉시트 뒤처리를 잘해낼 것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브렉시트로 주가가 높아진 여성이 세 명 더 있다. 야당인 노동당에선 소속 의원 75%가 제러미 코빈 대표에 대한 불신임안에 찬성해 예비내각 산업장관이던 앤절라 이글 의원(55)이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45)은 EU 잔류를 위해 독립 주민투표 추진 계획을 밝히면서 뉴스메이커로 등장했다. EU의 실질적 수장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영국의 공백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관심이다.
(3) '잔소리꾼' 빠진 EU, 덩치 키우나
유로존 자본시장동맹 구축 추진…EU 군대 창설에도 눈길 돌려
유럽연합(EU)은 독일에 이어 역내에서 두 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영국이 빠졌을 때의 악영향을 우려하면서도, EU 확대 시도를 가로막아온 영국의 이탈을 적극 이용하려 하고 있다.
유럽의 자본시장을 유로화 중심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그 가운데 하나다. EU는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의 금융산업을 통합 감독하는 자본시장동맹(CMU)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파운드화를 쓰는 영국이 강력히 반대해 무산됐다. 영국 출신인 조너선 힐 EU 집행위원은 CMU와 관련한 모든 논의를 가로막았다. 힐 위원이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사퇴하면서 걸림돌이 사라졌다. CMU가 탄생하면 글로벌 금융허브인 ‘시티 오브 런던’은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EU는 군사력 확대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다. EU는 군대 창설의 필요성을 제기해왔으나 영국은 번번이 퇴짜를 놨다. 유럽 안보에 적극 개입하려는 미국의 뜻을 영국이 표출하면서다. 미국 중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유지하고 군사 문제는 개별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NATO에는 전체 28개 EU 회원국 가운데 22개국이 속해 있으며 미국이 국방비의 75%를 부담하고 있다. 브렉시트는 자체 군사력 보유 논쟁을 촉발했다. 페데리카 모게리니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지난달 28일 EU 정상회의에서 “EU가 ‘외부의 위기’에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며 독자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제기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폴란드 헝가리 등이 EU가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며 “이들 국가는 장클로드 융커 EU집행위원장의 사퇴까지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4) 경제 먹구름 언제 걷힐까
주요국 증시 반등…한숨 돌렸지만 低성장 경제에 여전한 위협 요소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든 브렉시트 여파는 1주일 만에 일단 한숨을 돌린 모습이다. 주요국 증시가 반등했고 파운드화와 유로화 가치의 수직하락도 멈췄다. 하지만 브렉시트발(發) 경기 침체의 먹구름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브렉시트로 발생한 불확실성이 세계 경제에 핵심적인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게리 라이스 IMF 대변인은 30일(현지시간) 정례브리핑에서 “우리는 아마도 세계 경제에 가장 큰 위험 요인으로 작용할 불확실성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스 대변인은 “세계 경제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현실화된다면 행동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며 “과감한 정책이 (경제 성장의) 차이를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캐서린 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브렉시트가 중국 경제의 경착륙만큼이나 세계 경제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저성장의 덫에 빠진 세계 경제가 브렉시트 충격으로 더욱 휘청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브렉시트가 결정된 이후 로이터가 경제전문가 7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는 53%가 1년 이내에 영국 경기가 침체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ING리서치는 브렉시트로 인한 소비·투자 심리 위축과 환율 영향으로 내년에 유로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0.6%포인트 내려갈 것으로 내다봤다.
도이치뱅크는 투자보고서에서 “앞으로 1년간 미국 달러화 가치가 10% 상승한다고 가정했을 때 미국 GDP 증가율이 1년간 0.4%포인트 낮아지고 3년에 걸쳐 하락폭이 1.5%포인트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밝혔다.
(5) 소로스, 도이치뱅크 공격 이유는
"英보다 EU가 더 충격 받을 것"…도이치뱅크 주가 이틀새 20%↓
헤지펀드업계 대부인 미국의 조지 소로스(사진)는 브렉시트 결정이 나자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치뱅크를 타깃으로 삼았다. 그가 지난달 24일 공매도한 도이치뱅크 주식은 700만주로 전체 지분의 0.5%에 달했다. 소로스의 공매도 후 이틀간 도이치뱅크 주가는 20%가량 폭락했다.
소로스는 왜 파운드화가 아니라 도이치뱅크를 공매도 대상으로 택했을까. 국제통화기금(IMF)은 30일 도이치뱅크를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금융회사로 평가했다. 도이치뱅크가 외부 충격에 취약해 글로벌 금융시스템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소식에 이날 독일 증시에서 도이치뱅크 주가는 12.32유로까지 떨어졌다. 30년래 최저 수준이다. 올 들어서만 45% 폭락했다. 도이치뱅크는 전날 미국 중앙은행(Fed)이 시행한 스트레스테스트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월가 일각에서는 브렉시트 결정이 영국보다는 유럽연합(EU)에 더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을 제기했다. 회원국의 추가 이탈로 EU 결속력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파운드화가 아니라 유로화를 팔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런던 증시의 FTSE100지수가 이날 연중 최고치를 경신하며 브렉시트 충격에서 벗어난 반면 독일 닥스(DAX)지수는 5.6% 떨어졌다.
시장조사기관인 캐피털이코노믹스는 “브렉시트로 영국 경제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파운드화 가치 하락이 오히려 수입물가를 떨어뜨리고 관광수입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수출 확대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박종서/뉴욕=이심기 특파원 cosm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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