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 꺾인 방산업체
현대로템의 60m 차기 전술교량, 설치 실패하자 투자비 전액 회수
불합리한 원가 산정
출근시간 체크로 인건비 검증? 황당 실사에 '뒷돈' 유혹 빠져
즉흥적 방산정책
북한 도발할 때마다 무기수입 급급…국산무기 도입은 뒷전으로 밀려
[ 김순신 기자 ] 방위산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한국 방산이 경쟁력을 갖지 못하고 국내외에서 힘을 못 쓰는 핵심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군의 과도한 성능요구조건(ROC)과 각종 규제, 즉흥적으로 수립하는 방산정책이다.
“과도한 ROC와 규제로 방산업계는 기술을 향상시키기보다 연명하는 데 급급한 실정”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즉흥적인 정책 실행은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이뤄져야 할 투자를 방해하고, 수입 무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도한 ROC
한국군은 무기를 도입하거나, 개발할 때 세계 최고 수준의 ROC를 요구한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문제는 군의 ROC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매몰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방위사업체들이 기술개발을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10년 넘게 표류하고 있는 차기 전술교량 개발사업이 대표적 사례다. 차기 전술교량 개발사업은 2003년 합동참모본부의 요청에 따라 시작됐다. 전술교량은 전시에 다리가 끊어졌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다리다.
합참은 사업 시작 전에 교량 길이를 60m로 요구했다. 당시 세계 방산업체들이 생산한 전술교량 중 두 번째로 길었다. 방산 선진국인 영국, 스웨덴, 독일, 이스라엘이 개발한 교량의 길이는 각각 52m, 49m, 56m, 46m, 62m였다.
현대로템이 개발한 전술교량은 2009년 이후 여섯 차례 한 시험평가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해 결국 설치에 실패했다. 방위사업청은 2014년 현대로템과 계약을 해지했다. 이 회사에 지급한 착수금 162억7000만원, 보증금 18억원, 이자 23억6000만원 등 204억여원도 전액 회수했다. “차기 전술교량의 ROC를 한국군이 작전하는 데 큰 무리가 없는 50m 수준으로 잡았다면 현대로템이 충분히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방산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안영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군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성능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전력화 시점을 필요 이상으로 짧게 잡는 경향이 있다”며 “빠듯한 납기에 맞추려다 보니 설계에 결함이 생기고, 방산업체는 투자만 하고 요구 성능은 못 맞추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기 개발에 실패하면 모든 투자비를 토해내야 하는데 어떤 기업이 선뜻 투자에 나서겠느냐”고 되물었다.
○지나친 규제에 ‘뒷돈’ 유혹
지나친 규제도 경쟁력 약화의 원인 중 하나다. 불합리한 원가 산정이 대표적이다. 방산업체로 지정된 국내 95개 기업은 모두 생산원가를 방사청에 신고해야 한다. 방사청은 실사를 통해 이를 검증하고 허위사실이 있을 때는 부정당 제재(정당하지 못한 업체로 지정해 불이익을 주는 것)를 한다. 무기 구입을 위해 지급한 금액도 환수한다.
방산업계 고위 관계자는 “방사청이 고용한 평가 용역업체들은 현장실사 때 인건비 검증을 위해 생산직원이 제때 출근했는지, 근로감독관이 일지를 제대로 작성했는지까지 일일이 점검한다”며 “사소한 사항까지 모두 실사를 당하는 방산기업으로선 용역업체에 뒷돈이라도 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군에 고춧가루를 납품하는 전남 함평의 한 마을이 계약에 명시된 장소에서 고춧가루를 생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정당 제재를 받은 사례도 있다”고 덧붙였다.
○장기 투자 막는 즉흥 정책
정부의 즉흥적인 방산정책도 기업들이 중장기 사업전략을 수립하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 북한의 새로운 도발이 있을 때마다 들끓는 국민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사전 준비 없이 무기 도입을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때가 많다. 그 경우 기업은 어떤 무기를 개발하는 데 투자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
2013년 북한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무인기 3대가 경기 파주와 서해 백령도, 강원 삼척에서 발견됐다. 그 직후 군은 2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스라엘제 저고도 탐지 레이더 PPS-42 10여대를 도입했다. 업계 관계자는 “2012년 국내 업체가 개발한 저고도 탐지 레이더를 개량하는 방법도 있었다”며 “하지만 군은 국산화 고려 없이 즉각 해외 무기 수입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도발 이후엔 해외 무기를 수입하는 게 거의 공식화됐다”고 덧붙였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정권이 바꿜 때마다 정부가 창조국방, 녹색국방 등 정치색 짙은 정책을 들고 나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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