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라이프] 박종복 SC제일은행장, '영어 능통' 대신 '영업 달인' 선택…"JB는 진국"

입력 2016-07-05 20:13  

CEO 오피스

제일은행 간판으로 '1등 DNA' 되살린다

SC그룹 첫 한국인 행장
선·후배 영어 공부 '올인'할 때 영업현장 지키며 실적 올려
본사 "영업통 JB, 행장 적임자"

직원들엔 '카푸치노 행장님'…"커피 사줄게" 격의 없이 대화
"보고용 문서 대신 영업 집중"…문자·이메일 보고 즉시 답변

변신 없이는 10년 못 버텨
태블릿 PC 들고 찾아가는 뱅킹
상품 10만건 판매, 비용도 절약



[ 이현일 기자 ] 1986년 제일은행 성수동지점 지점장실. 입행 7년차 박종복 행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박 행원은 ‘넥타이 수출업체의 고액 외화수표 추심 전 매입(대금 선지급) 요청을 받아들이라’는 지점장 지시를 끝까지 거부했다. 일선 담당자인 박 행원이 보기엔 이 업체의 거래 흐름에 수상한 점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간은 지점장의 곱지 않은 눈초리를 견디느라 힘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넥타이 업체 사장이 미술품 매매 사기 혐의로 구속됐고, 넥타이 수출은 거액 사기를 위한 위장거래였음이 밝혀졌다.

소신 지킨 업무보고로 위기 모면

박종복 한국SC제일은행장은 지점에서 일할 때 우직한 영업맨으로 통했다. 1991년 36세의 박 차장은 입행 후 일곱 번째 발령지로 서울 테헤란로지점 개설 준비팀에 배치됐다. 모두가 신흥 부자를 고객으로 붙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던 시절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점이 개설됐고 대형 금융사기에 휘말릴 뻔한 일을 그 무렵 겪었다. 어느 날 벤츠 승용차를 타고 나타난 한 신사는 대출 상담을 하고 싶다며 사무실로 그를 이끌었다. 그 사무실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 인사가 함께 앉아 있었고 벽에는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도 걸려 있었다. 지점 개설 초기라 실적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서 대출은 물론이고 거액 예금까지 유치할 기회였다.

그러나 박 차장은 지점으로 돌아와 지점장에게 “거래를 거절해야겠다”고 보고했다. “부동산 개발 사업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상사들이 고집 센 놈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끝까지 버텼죠.”

며칠 뒤 뉴스를 보던 박 차장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시 세상을 들썩이게 한 대형 부동산 사기 사건에 벤츠를 타고 온 신사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박 행장은 “그때 ‘좋은 게 좋은 것’이란 식으로 주변의 부추김에 휩쓸려 거래했다면 은행을 그만둬야 했을지 모른다”며 “간부가 된 뒤에도 직원들의 소신있는 의견 개진을 존중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은발의 ‘제이비(JB)’ 은행장이 되다

본사에서 근무한 기간이 긴 다른 시중은행장들과 달리 박 행장은 은행원 생활 대부분을 영업점과 콜센터 등 고객을 상대하는 일선에서 보냈다. 제일은행이 SC그룹에 인수된 뒤 다른 임원들은 외국인 경영진과 소통하기 위해 영어 공부에 매달렸지만 박 행장은 본업인 영업에 집중했다. 영어 잘하는 선후배들이 본사 근무 경력을 쌓고 고속 승진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늦은 나이에 영어 공부를 하는 것보다 본업에 충실해 실적을 쌓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일에 매진했다.

그 후 10여년이 흘렀고 고속 승진한 선후배들은 하나둘 은행을 떠났다. 그리고 첫 한국인 행장 자리는 비록 영어가 능통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현장에서 자리를 지킨 그의 몫이 됐다. 국내 영업을 강화하려는 SC그룹에선 영업 부문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박 행장이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직언을 망설이지 않는 그의 업무 스타일을 당돌한 게 아니라 의사표현을 분명하게 하고 적극적으로 일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SC그룹에서는 영문 이니셜을 따서 박 행장을 ‘제이비(JB)’라고 부른다. 흰 머리카락 때문에 ‘은발의 제이비’로도 통한다. SC그룹의 세계 은행장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회의에 유일하게 박 행장만 통역을 대동하고 참석한다. 박 행장은 “영어만 잘한다고 외국인 상사에게 인정받을 순 없다”며 “프로 근성이 있는 사람이 더 대우받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핵심을 찌르면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통역을 거쳐서도 충분히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했다.

영국 본사 설득해 ‘제일은행’ 되살리다

박 행장이 은행장이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일은행’ 브랜드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영국 본사에 말을 꺼내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본사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취임 후 그룹 회의에 갈 때마다 기회만 있으면 은행명 변경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그룹 브랜드담당 대표를 만나 ‘행명 변경 없이 한국에서 영업을 못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했습니다. 배수진을 치고 답을 안 해주면 못 간다고 했죠. 결국 그 자리에서 답을 받았습니다.”

박 행장은 1년여 작업 끝에 지난 4월 은행명을 ‘SC제일은행’으로 바꿨다. 2012년 1월 SC그룹의 의지에 따라 은행명을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으로 바꾸면서 ‘제일’이라는 이름을 뺀 지 4년여 만이었다. 과거 설립연도 순서에 따라 ‘조상제한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중은행들은 이제 합병 등으로 그 이름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제일은행만 다시 살아났다.

제일은행 이름을 살리면서도, 과거의 보수적이고 경직된 문화는 바꿔나가고 있다. 박 행장은 직원과 간부가 언제 어디서나 격없이 대화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틈 나는 대로 직원들을 만나 커피숍으로 데리고 가 커피를 사준다. 박 행장은 매번 카푸치노 커피를 주문해 직원들 사이에서 ‘카푸치노 행장’으로도 불린다.

박 행장은 수행비서가 없다. 사전에 예고하지 않고 혼자 지점을 방문하기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파악하고 직원들의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행장 보고용 문서를 최대한 줄이고, 중요하지 않은 일은 이메일이나 모바일 문자로 보고받고 즉시 답을 준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박 행장은 향후 10년 내 은행업에 위기가 닥칠 것으로 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저금리로 은행 이자마진이 줄어들고 금융의 고유 영역은 유통, 정보기술(IT)업계 등 다른 산업에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모바일뱅킹, 인터넷뱅킹 등 비대면 채널이 확대되면서 고객의 90% 이상이 지점에 오지 않고 은행 거래를 한다.

박 행장이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 중 하나는 태블릿PC에 은행업무를 담아 고객을 찾아다니며 영업하는 시스템이다. 그가 5년 전 소매채널사업본부장 때부터 구상한 것이다. “보험사도 아니고 무슨 은행 직원이 방문판매를 하느냐며 손가락질하던 시절이었지만 새로운 채널을 찾지 않으면 이대로는 10년을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SC제일은행은 2014년 7월 모빌리티플랫폼이라는 태블릿PC 기반의 찾아가는 뱅킹 서비스를 시작한 뒤 예금, 대출, 카드 발급, 펀드 가입까지 태블릿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신세계백화점 10곳과 이마트 44곳에 1~3인 규모의 소규모 점포인 뱅크샵 8개와 뱅크데스크 59개를 설치해 추석과 설날 명절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야간과 주말에도 은행 서비스를 제공한다.

박 행장은 “그동안 태블릿 뱅킹으로 10만건이 넘는 상품을 판매했고 종이 서류도 65만장이나 절약했다”며 “서비스 시행 후 영업 인력의 평균 판매 건수가 약 30% 늘어났다”고 말했다. 이 시스템은 10여개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으로 수출도 했다.

박종복 대표 프로필

△1955년 충북 청주 출생 △1974년 청주고 졸업 △1979년 경희대 경제학과 졸업 △1979년 제일은행 입행 △2004년 강남·부산 PB센터장 △2007년 영업본부장 △2009년 프리미엄뱅킹사업부장 △2011년 소매채널사업본부장 △2014년 리테일금융총괄본부장(부행장) △2015년 SC제일은행장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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