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만능' 정치권 - 갈등 풀기는커녕 혼란 더 부채질
●외부세력 '선동' - 총리 폭력사태에도 외부인 개입
●'님비' 지역 이기 - 국가안보까지 "우리만 아니면 돼"
● 국책사업마다 갈등 - 사회적 비용, 눈덩이처럼 불어나
"안보마저 지역 볼모 돼…몸 던져 국민 설득하는 리더십 보여라"
전문가들 "지역 불만 편승해 표만 좇는 정치권
당장 인기 연연말고 국가미래 위해 할 말 해야"
[ 유승호/박종필/김기만 기자 ] 대한민국이 또다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사드(THAAD·고(高)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설득을 위해 경북 성주를 찾은 황교안 국무총리가 봉변을 당한 뒤 “이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총리의 봉변은 안보 등 국가 주요 사업이 지역 이기주의와 외부 세력 개입, 정부의 안이한 대처,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권의 표 만능주의에 갇혀 표류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드뿐만이 아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주한 미군 평택 이전,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설치 등 핵심 국가사 汰?비슷한 갈등 과정을 거쳤고,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정치인은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기는커녕 여론에 편승해 지역주의를 부추기며 갈등을 조장했다. 용기 있게 나서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공식적으로는 사드 배치에 찬성한다면서도 배치 지역으로 선정된 대구·경북지역 여론을 의식해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 소속 대구·경북지역 국회의원 20명은 “사드 배치 지역에 대한 국책사업 지원 등 인센티브를 마련하고 종합 대책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 중엔 이른바 ‘진박(진실한 친박)’을 포함해 친박(친박근혜)계 의원도 다수 포함돼 있다. 선거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가깝다는 점을 내세워 당선돼 놓고 자신의 지역구가 사드 배치 지역으로 결정되자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야당도 혼선을 거듭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는 “실익 있는 사드 배치라면 반대하지 않는다”며 찬성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김 대표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총리 저고리를 벗겨 휴대폰을 가져가고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인영 우원식 설훈 유은혜 유승희 등 더민주 내 민주평화국민연대 소속 의원들은 사드 배치에 반대하고 있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성주에서 봉변을 당한 것에 대해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국민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했던 일이며 현상만 부각해 주민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부가 갈등조정 능력의 부재를 자인하는 것”이라며 김종인 대표와의 시각차를 드러냈다. 더민주는 아직 사드 관련 당론을 정하지 못했다.
국민의당은 사드 배치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사드 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던 국민의당 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17일 오찬 기자간담회에서 “아무리 화가 나도 지금 세상에서 폭력으로 막 던지고 그래서는 안 된다”면서도 “달걀 던진 것만 수사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박 위원장은 또 “60년 전통 야당의 정체성이 그래선 안 된다”며 더민주에 사드 관련 당론 채택을 요구했다.
사드를 둘러싼 난맥상은 주요 국책사업 및 국가 안보와 직결된 사업을 놓고 벌어졌던 혼란과 갈등의 재판이다.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설치, 평택 미군기지 이전, 제주 해군기지(민군복합항) 건설 등이 사드와 비슷하게 정부·정치권의 무능과 지역 주민, 시민사회단체 등의 반발에 휘말려 줄줄이 표류했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변전소 건설 공사가 이웃한 충남 당진시 반대로 지연되는 등 기업 투자가 난관에 부딪힌 일도 한두 번이 아니다. 기업들이 불확실성을 피해 외국으로 떠나는 이유 중 하나다.
정부는 그간 사드와 관련해 ‘제안도, 협의도, 결정도 없었다’는 ‘3NO’로 일관하다 지난 8일 사드를 내년 말까지 배치하기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또 사드 배치를 발표한 지 닷새 만인 13일 배치 지역을 결정했다. 정치권과 일부 시민단체, 해당 지역 등에서 선정 기준을 투명하게 밝히라며 반발하는 데 좋은 빌미가 됐다. 정부는 17일 황 총리 주재로 열린 안전관계장관회의에서도 프랑스 니스 테러와 터키 쿠데타 대책만 논의했을 뿐 사드 배치 후속 대책은 내놓지 못했다.
국론을 통합해나가려 하기보다 분열을 이용하려는 정치 풍토가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국회의원이 지역을 대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문제만큼은 예외”라며 “소아병적 지역주의에서 못 벗어난 채 지역 갈등에 불을 지르고 있다”고 말했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분열과 갈등에 편승해 표를 얻기는 쉽지만 불만세력을 설득하기는 어렵다”며 “대선주자와 중진 의원들마저 인기영합적 발언을 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김 전 의장은 “국민 앞에 나와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당장은 오해를 받더라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국민 통합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논란이 예고된 대형 국책사업 때마다 갈등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접근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은 “정부는 사드 필요성에 대해 국민을 상대로 이해를 구한 적이 없다”며 “국민 설득을 위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가상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가 안보에 직결된 문제인 만큼 적절한 보상책 등을 마련해 지역 주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성주 군민들에게도 이성적으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다. 신율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정부에 잘못이 있다고 해서 불법과 폭력을 동원하는 것은 스스로의 정당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했다.
유승호/박종필/김기만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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