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만 관객 신화'의 그림자…무너지는 영화예술의 다양성

입력 2016-07-29 17:50  

김희경 기자의 컬처 insight


[ 김희경 기자 ] ‘1000만.’ 영화계에 이 숫자가 처음 등장한 건 2004년이었다. ‘실미도’의 관객이 1100만명을 넘어서면서였다. 국내 최초로 1000만 영화가 등장하자 대중은 ‘대작의 탄생’이라며 열광했다. 12년이 흐른 지금, 이 숫자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영화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중의 관심은 온통 1000만에 쏠려 있다. 영화 ‘부산행’이 개봉 10일 만인 29일 700만 관객을 넘어서자 이 작품이 올해 첫 1000만 영화가 될지, 경쟁작인 ‘인천상륙작전’이 그 영광을 차지할지 벌써부터 많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작품성에 대중성까지 두루 갖춘 작품이 나와 1000만 영화 대열에 합류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똑같은 작품을 보는 취향의 획일화는 불편하지 않은가. 모두가 1000만이란 숫자에 열광하는 사이 문화산업의 중요한 가치인 다양성이 무너지고 있다. 문화·예술의 꽃을 다채롭게 피우기 위한 ‘실험실’이 돼야 할 문화적 토양이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주목하는 스코어 보드로 가려지고 있다.

관객 수에 대한 맹목적인 관심은 다양성 영화가 설 자리를 빼앗고 있다. 다양성 영화란 작품성, 예술성이 뛰어난 저예산의 독립 영화 등을 이른다. 2011년 전체 개봉작의 45%를 차지한 다양성 영화는 2015년 29%로 줄었다. 원칙도 사라지고 있다. 영화 ‘부산행’은 개봉 전 유료 시사회를 열었다. 영화를 미리 소개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무료로 열어온 시사회를 유료로 바꾼 것. 이를 통해 확보한 관객이 56만5614명. 이는 전체 관객 수에 고스란히 포함됐고, 개봉 초기 흥행의 마중물 역할을 했다. 영화가 달성한 기록은 축하할 일이지만 ‘변칙 개봉’이 관객의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특정 영화가 전국 극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크린 몰아주기’ 논란 등도 여전하다.

영화 제작사가 ‘1000만’의 달콤함에 빠지는 것은 흥행이 곧 수익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플랫폼의 변화와 함께 이런 공식은 달라지고 있다. 오프라인에선 흥행 상위 작품 20%가 매출의 80%를 차지하는 ‘파레토 법칙’이 적용된다. 그러나 극장 밖 열린 플랫폼에선 다르다. 온라인·모바일 등에선 하위 80% 작품이 절반 이상의 매출을 내는 ‘롱테일 법칙’이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에 넷플릭스, 아마존 등은 다양한 작품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박스오피스 경제학》을 쓴 경제학자 김윤지 씨는 “디지털 공간에선 작품 수를 늘리는 것 자체가 더 의미 있다. 보다 ‘롱테일스럽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튼튼한 문화적 토양을 위해서도 다양성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다.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서 탄생한 미술, 음악, 건축 등 다양한 문화적 성과는 오늘날까지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를 이끈 화가 클림트와 실레, 음악가 말러 등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다수가 정해놓은 기존 틀과의 ‘분리’를 선언한 ‘빈 분리파’다. 이들은 다양성을 위해 전위적 시도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예술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시대엔 그 시대 나름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다시 국내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올 상반기 ‘무(無)1000만’이란 말이 영화계를 짓눌렀다. 지난해 1000만 영화가 상반기부터 쏟아진 것과 달리 올해에는 아직 한 편도 나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곡성’ ‘아가씨’ 등 국내 영화사에 길이 남을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연 1000만 영화가 나올 것인가’에 모두의 관심이 쏠린 지금, ‘곡성’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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