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재연 기자 ]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망한다’는 속설이 깨지고 있다. ‘동주’ ‘귀향’ ‘아가씨’에 이어 지난 3일 개봉한 ‘덕혜옹주’는 개봉 1주일 만에 관객 230만명을 넘어섰다.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과 조선인 일본경찰 간의 암투와 회유를 그린 김지운 감독의 영화 ‘밀정’, 일본 군함도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의 이야기를 다룬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 등 개봉을 앞두거나 촬영 중인 영화도 많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라를 빼앗긴 비극적이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역사적 비극과는 별개로 신문물을 흡수한 남녀의 자유연애가 이뤄지고, 신시대와 옛시대가 뒤섞인 시기라는 점도 영화 소재를 발굴하기에 더 없이 좋은 조건이다.
지난해 최동훈 감독의 ‘암살’이 관객 1270만명을 넘어서며 흥행에 성공하기 전까지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흥행 사례는 거의 없었다. ‘도마 안중근’(5만명)을 비롯해 ‘라듸오데이즈’(21만명) ‘모던보이’(76만명) ‘경성학교’(35만명) 등이 잇달아 흥행에 실패했다.
대작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 당시로서는 거액인 20억원의 제작비에 정준호 장동건 이범수 등 톱스타를 캐스팅해 제작한 한·중 합작영화 ‘아나키스트’의 관객은 23만명에 불과했다. 한·중·일 합작에다 장동건, 오다기리 조, 판빙빙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제작한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는 210만명에 그쳤다. 280억원의 제작비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표였다.
유명 감독과 스타 배우들이 만나도 흥행이 어려운 건 역사적으로 민감한 시기여서 국민 감정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초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삶을 그린 영화 ‘청연’은 실존 인물 박경원의 친일행위가 논란이 되면서 누리꾼들이 관람 거부 운동을 벌였다. 한·일 병사의 우정을 그린 마이웨이도 친일 논란을 불렀다. 조선 마지막 옹주의 기구한 삶을 다룬 덕혜옹주도 작품성과 배우들의 호연에도 불구하고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 ‘무기력했던 조선 마지막 왕실의 삶을 미화할 수 있다’며 ‘역사왜곡 논쟁’이 벌어졌다.
고증과 복원을 위한 비용이 막대한 점도 부담이다. 세트와 의상에만 35억원을 투입한 암살은 손익분기점이 600만명이었다. ‘아가씨’ 역시 순제작비가 124억원에 달했다.
충무로의 ‘일 ┛?”?징크스’가 깨지면서 나름의 ‘흥행 공식’도 생기고 있다. 시대 상황을 무겁게 직시한 영화(암살, 동주, 귀향, 덕혜옹주)는 흥행에 성공하고, 낭만에 집중해 시대가 소품으로 전락한 경우(‘해어화’ ‘라듸오 데이즈’ ‘원스어폰어타임’ ‘가비’)는 흥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가 된 따냐가 고종황제 암살작전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린 가비(27만명)나 일제강점기에 가수를 꿈꾼 마지막 기생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해어화(49만명)가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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