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가던 양평 산책로서 발견
옆엔 '롯데' 쓰여진 우산만…
용산구 아파트 경비원
"어젯밤 웃으며 인사했는데"
친구인 강건국 가일미술관장
"된장찌개·김치찌개 즐기던 소탈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경찰, 부검 후 자살로 결론
[ 마지혜 기자 ] 지긋지긋한 폭염을 씻어내려는 듯 비가 내린 26일 새벽, ‘롯데그룹의 산 역사’로 불리던 이인원 롯데그룹 정책본부장(부회장)이 경기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북한강변의 한 산책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른편에 북한강을 두고 3㎞가량 이어지는 산책로 진입구에서 불과 40m가량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지름 10㎝, 높이 3m 벚나무가 그의 삶의 마지막 장소였다. 목을 맨 넥타이가 끊어져 나무 아래에 웅크린 채 발견된 이 부회장의 시신 옆에는 ‘롯데’라는 글자가 새겨진 진한 고동색 우산이 놓여 있었다.
26일 수사당국과 롯데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전날 오후 6시30분께 마지막 보고를 받은 뒤 7시께 퇴근했다. 오후 8시16분께 정장 차림으로 자택인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아파트 1층 현관으로 들어왔다. 특별한 기색은 없었다. 당일 근무한 경비원은 “이 부회장이 집에 들어오면서 우편물을 확인한 뒤 웃는 표정으로 ‘조금 있으면 아내도 퇴원할 것’이라며 인사했다”고 전했다. 이 부회장 부인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입원 중이다. 1시간40분가량이 흐른 오후 10시께 그는 지하주차장에서 자신의 제네시스 차량을 몰고 나와 서울~춘천고속도로를 타고 양평의 북한강변 산책로로 왔다.
그랬던 이 부회장이 26일 오전 7시10분께 산책로에 운동하러 나온 주민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다. 검은색 점퍼에 베이지색 반바지, 트레킹화 차림이었다. 산책로 초입에 있는 한 식당 앞에 주차돼 있던 그의 차량 조수석에는 자필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 넉 장(표지 한 장 포함)과 여분의 넥타이가 발견됐다. 차량에 블랙박스는 없었다.
이 부회장의 시신이 발견된 산책로를 직접 촬영하는 폐쇄회로TV(CCTV)가 없어 경찰은 도로가에 설치된 CCTV 영상을 수거해 분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서는 유가족이 비공개를 요청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이날 오전 이 부회장의 시신이 발견된 현장에는 한 중년 부부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부회장 내외와 5~6년 전부터 친구 사이로 지냈다는 강건국 가일미술관 관장 부부였다. 강 관장은 “이 부회장이 5년 전쯤 미술관에 들른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됐다”며 이 부회장과의 인연을 들려줬다.
그는 “이 부회장은 주말에 한두 번씩 직접 운전대를 잡고 아내와 함께 산책과 휴식을 즐겼다”며 “미술관 숙소에서 우리 부부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로 소박한 식사를 함께했다”고 떠올렸다. 이어 “이 부회장은 남한테 폐를 끼치는 게 싫다며 내 아내가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미안해하고 술도 하지 않았다”며 “양평 인근에 소박한 집을 짓고 부인과 함께 노년을 보내고 싶다던 사람이 이렇게 가 황망한 심정”이라고 했다.
경찰은 사인 규명 차원에서 유족의 동의를 받아 시신을 부검한 뒤 자살로 결론내렸다. 경찰 관계자는 “부검결과 목을 맨 흔적 외엔 손상이 관찰되지 않았다”며 “부검 직후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했다”고 말했다. 유족은 롯데그룹 측과 협의를 거쳐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 빈소를 마련했다. 롯데그룹 측은 “장례는 롯데그룹장으로 5일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양평=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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