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이은 두 번째 의사로
황해·평안도 등서 무료진료
의사로 활동중 폐결핵 사망
국내 결핵퇴치 운동 계기돼
[ 박근태 기자 ] 1911년 가을 벨기에 브뤼셀에는 아인슈타인과 로렌츠, 드브로이, 푸앵카레 등 당대 걸출한 과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과학 분야에서 미해결 문제를 다룬 최초 국제학회인 솔베이 회의다. 이 자리에는 수많은 남성 과학자 사이에 홍일점이 있었다. 세계적 여성 과학자이자 두 번이나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도 여성 과학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박 에스더라고 불린 한국인 첫 여의사 김점동(1876~1910·사진)이다.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와 김근배 전북대 교수 등 국내 과학사가들은 김점동을 한국의 첫 여성 과학자로 평가한다. 김점동은 퀴리 부인보다 10년 늦은 1876년 태어나 1896년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00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인으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 의사가 됐다.
가난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그는 선교사로 와 있던 아펜젤러 목사 소개로 이화학당에 네 번째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영어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졸업 후 한국 최초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로제타 셔우드홀 여사의 통역을 맡게 됐다. 김점동이 처음부터 의사에 대한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언청이로 불리는 구순구개열 환자가 수술을 받고 정상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 마음을 바꿔 자신도 의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구한말 한국인 가운데 서양의학을 공부해 의사가 된 사람은 매우 적었다. 미국에서 최초로 의사자격증을 딴 서재필, 일본에서 의학교를 졸업한 김익남과 안상호, 1899년에 세워진 의학교 졸업생 30여명과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 7명이 전부였다. 1900년 이전에 의대를 졸업한 사람은 서재필, 김익남, 김점동 세 사람뿐이란 점에서 그의 졸업은 한국 의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김점동은 1900년 의사가 된 뒤 곧바로 귀국길에 올라 서울 보구여관의 책임의사로 활동했다. 1903년 평양 기홀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10개월 만에 환자를 3000명 이상 진료했다. 황해도, 평안도 등을 순회하면서 무료 진료 활동도 펼쳤다. 김점동이 최초 여의사가 된 데는 뉴욕에서 힘든 농장일을 하며 그의 학비를 대다 그만 폐결핵으로 숨진 남편 ‘외조’의 힘이 컸다. 그 역시 1910년 4월 남편과 같은 폐결핵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훗날 한국의 결핵 퇴치 운동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의 아들이자 선교사이던 셔우드 홀은 평소 가깝게 지내던 김점동의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한국에서 결핵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셔우드 홀은 1932년 해주구세요양원 이름으로 한국 최초 크리스마스 실을 발행했다.
김점동이 세상을 뜬 뒤 새로운 문물을 공부한 여성은 점점 늘었다. 그의 영향으로 의사를 희망한 여성이 늘어났고, 마침내 1928년 경성여자의학강습소(고려대 의대 전신)가 세워졌다. 그렇게 일제강점기에 모두 17명의 여성이 국내외 대학에서 과학기술을 전공했다. 1929년에는 송복신 박사가 미국 미시간대에서 1호 여성 박사가 됐고 광복 직후 생물학 분야에서 이유한 박사가, 농학 분야에서 김삼순 박사가 배출되면서 여성 과학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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