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간 세간의 이목 끌기 위해 정치인들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
김영삼 전 대통령 등 군사정부 시절엔 민주화 위한 저항
그 이후엔 정파적·개인적 이해 위해 곡기 끊어
지지층 결집 효과 있지만 “정치적 책임 회피 수단” 지적도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27일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 농성에 대해 “타고 있는 불안한 정국에 휘발유를 퍼넣는 것”이라고 했다. 초유의 집권당 대표 단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얘기다.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안 처리를 주도한 정세균 국회의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이틀째 단식 농성을 벌인 이 대표는 “며칠 정해놓는 식으로 장난처럼 할 거였으면 시작하지도 않았다”고 결기를 나타냈다.
정치인의 단식농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짧은 시간에 세간의 이목을 확 끌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1983년 5월 민주회복과 정치복원 등 5개항을 내걸고 23일간 단식을 벌인 것은 유명하다. 전두환 정권이 자신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가택연금 조치를 한데 대해 항거한 것이다. 단식이 1주일 넘어가면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전두환 정권은 YS를 서울대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다. YS는 병원에서도 단식을 이어갔다. 한 측근은 “YS가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이자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입원한 곳 주변 병실을 차지해 자장면을 시켜먹거나 불고기를 구워 먹는 등 자극적인 음식 냄새를 풍겨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을 방해했다”고 회고했다.
YS는 단식 끝에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그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집권여당 사무총장을 시켜 단식 철회를 요구하자 “나를 시체로 만든 뒤 해외로 부치면 된다”고 반대했다. 이 단식은 지리멸렬하던 민주화 세력이 총집결해 1987년 민주화를 이끈 촉매제가 됐다고 YS는 생전에 회고했다. YS가 정권을 잡은 뒤 공수가 뒤바뀌었다. 내란죄로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95년 항의의 표시로 20여일간 단식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민당 총재 시절인 1990년 여권이 추진했던 내각제 포기 선언, 정치 사찰 중단, 지방자치제 전면 시행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농성을 했다.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는 1987년 5월 4·13 호헌 조치 철회 등을 요구하며 15일간 단식을 했다.
단식은 군사정부 시절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었으나 이후엔 정파적, 개인적 이해 관계를 위한 것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새누리당으로부터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정 의장은 2009년 7월 민주당 대표 때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에서 5일간 단식 농성을 한 적이 있다. 2003년 11월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측근 비리 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하며 17일간 곡기를 끊었다. YS는 당시 한나라당 당사에 마련된 단식투쟁장을 찾아 “굶으면 죽는다”는 말을 남겨 화제가 됐다.
서청원 새누리 ?의원은 2009년 친박연대 대표 시절 총선에서 비례대표 공천 명목으로 특별당비를 받은 혐의로 징역형을 받자 부당하다는 항의의 표시로 25일간 옥중단식을 했다. 박종웅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1년 언론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전재희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5년 행정도시법 국회 통과에 반발해, 권철현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07년 이회창 전 총재의 대선 출마 포기를 촉구하며,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은 2011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의 한나라당 단독 처리를 반대하며 각각 단식 투쟁을 했다.
2005년 11월 당시 정진석 국민중심당 의원과 열린우리당의 선병렬·양승조 의원이 행정도시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두고 찬성 논리를 내세우며 헌재 압박 성격의 단식을 했다. 선거용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014년 8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화문 광장에서 26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2012년 9월 강기갑 통합진보당 대표는 당내 신·구 당권파 간 갈등에 책임을 지고 5일간 물과 소금 섭취도 않는 ‘단수단염’단식을 했다.
2007년 현애자 민주노동당 의원은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며,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는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더민주 소속 이재명 성남시장은 지난 6월 박근혜 정부가 지방정부를 말살한다는 이유를 들어,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지난 7월 홍준표 경남지사의 사퇴를 촉구하며 각각 단식을 했다.
2007년 3월 김근태 열린우리당 전 의장, 민생정치모임 천정배 의원, 문성현 민주노동당 대표는 한·미 FTA 저지 명목으로 단식 명단에 올렸다.
단식은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내 투쟁의 결기를 높이고 전통적 지지층을 결집하며 여론을 환기시키는 효과도 있다. YS의 사례에서 봤듯,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반면 정치 지도자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라는 강경투쟁을 선택한다는 지적도 있다. 협상력과 대화, 소통의 부재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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