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트 넘버 원 카베르네 소비뇽'
부드러운 풍미로 五感 사로잡아
1976년 5월, 파리에서 세계 와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벌어졌다. 프랑스 와인과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 시음대회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1위를 차지한 것. 와인의 상표를 가리고 점수를 매기는 블라인드 시음이었고, 심사위원이 프랑스 최고의 와인 전문가들이었기에 충격이 더 컸다. 프랑스 와인이 세계 최고라고 믿었던 당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 사건은 훗날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이라고 불렸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의 제안으로 1986년과 2006년에 재대결했지만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의 승리로 끝났다. 캘리포니아 대표 와인 산지인 나파밸리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이 ‘파리의 심판’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다. 경이로운 승리를 거둔 캘리포니아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금주령 시대에 와인을 생산한 비밀
나파밸리(Napa Valley)는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약 80㎞ 떨어져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를 타고 약 1시간 반쯤 지나자 영화에서나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길 양옆으로 포도밭이 있고, 그 사이에 나타나는 근사한 와이너리들이 햇살을 받아 빛난다.
도착한 곳은 나파밸리의 심장부 세인트 헬레나(St. Helena)에 있는 루이 마티니(Louis M. Martini) 와이너리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마티니 와이너리는 금주법이 시행된 시대를 기회로 삼아 발전한 곳이다.
1919년 미국에서는 금주법이 통과돼 이듬해부터 술을 만들거나 파는 것이 전면 금지됐다. 많은 와이너리가 문을 닫았고 미국 와인 역사는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이 무렵 루이 마티니는 와인 양조에 불타오르던 서른두 살 청년이었다. 와인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합법적으로 와인을 만드는 방법을 백방으로 찾았다.
루이 마티니 와이너리를 안내하던 홍보대사는 “당시에 금주법을 어기지 않고 술을 유통하는 방법은 가톨릭 미사에 쓰이는 미사주를 공급하는 것, 의사가 환자에게 약용으로 처방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장소는 루이 마티니 와이너리의 테이스팅 룸. 밖에서 봤을 때는 아무 간판도 없는 커다란 창고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근사한 바(bar)가 나타났다. 노출 벽면과 어두운 조명으로 꾸며진 모습 때문에 마치 스피키지 바(Speakeasy Bar, 금주령 시대에 간판 없이 몰래 운영된 비밀 술집) 같다. 옛날 비밀 이야기를 듣기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장소다.
두통에는 와인이 최고!
루이 마티니는 의사를 고용하고 가톨릭 교회에 미사주를 공급했다. 당시에는 가벼운 두통이나 불면증에 한두 잔의 와인이 처방됐다. ‘두통이 있다면 루이 마티니를 찾아오세요’라고 주위에 알려서 많은 사람이 그를 찾아오도록 했다.
금주령 시기에는 술을 사기 어려웠으므로 많은 사람이 직접 만들어 마시기 위해 원료인 포도를 찾았다. 루이 마티니는 ‘금단의 열매(Forbidden Fruit)’라는 이름으로 포도 농축액을 만들어 팔면서 ‘물과 이스트를 넣고 화씨 85도 이상으로 두지 마세요. 알코올성 음료인 와인이 되어버립니다’라는 경고 아닌 경고문을 써넣었다. 사실상 와인 제조법을 알려주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이 제품은 미국 각지로 팔려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금주법이 풀린 1933년 나파밸리의 심장부인 세인트 헬레나 지역에 공식적으로 루이 마티니 와이너리를 설립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끝난 뒤 네 가지 와인을 시음했다. 모두 나파밸리의 대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밭에서 자랐거나, 조금씩 다르게 양조돼 각자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로트 넘버 원 카베르네 소비뇽(Lot No.1 Cabernet Sauvignon)’이 가장 깊고 부드러운 풍미로 오감을 사로잡았다. 최상급 포도로만 만든 와인을 1번 오크통으로 숙성한 것에서 이름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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