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번홀 그녀는 울었지만…18년간 세리가 있어 행복했다

입력 2016-10-13 17:58  

KEB하나은행 챔피언십 1라운드 마치고 은퇴식

"축복속에 떠날 줄은…" 후배와 일일이 포옹하며 눈물
축가로 '상록수'…박세리 기념모자 똑같이 쓰며 인사도



[ 이관우 기자 ]
“행복했고 고마웠습니다. 이런 축복 속에서 떠나게 될 줄은….”

13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GC 오션코스 18번홀. 무선마이크를 들고 단상에 오른 박세리(39·하나금융그룹)의 손이 떨렸다. 박세리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모자를 쓴 1000여명의 갤러리와 팬 사이에서 긴 탄식과 격려의 박수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눈물 범벅이 된 그는 “부족한 저에게 지금까지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말을 이어갔다. 박세리는 “골프 선수 박세리가 아니라 유망한 후배들을 위한 박세리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며 “좋은 말씀과 격려의 채찍질 부탁드린다”고 했다. 팬들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떠나는 전설의 고별 무대를 아쉬워했다.


박세리는 18번홀(파5)을 파로 마친 뒤 캐디와 아버지 박준철 씨, 골프 후배들과 차례로 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 이번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올림픽을 함께한 ‘골든슬래머’ 박인비(28·KB금융그룹), 최나연(29·SK텔레콤) 등 ‘세리키즈’뿐 아니라 선동열 전 KIA타이거즈 감독, 김세진 OK저축은행 배구단 감독, 개그맨 남희석 씨 등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은퇴식은 박세리의 투어생활 18년을 집약한 헌정 동영상 상영과 가수 손승연 씨, 리틀엔젤스가 축가로 ‘상록수’를 부르는 순으로 진행됐다. 대회에 참석한 모든 팬들에게 개방한 이날 열린 은퇴식에서 팬들은 박세리 기념모자를 똑같이 쓰고 모자 챙을 들었다 놓는 특별한 세리머니로 전설의 퇴장에 경의를 표했다. 박세리와 함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감독으로 출전한 탱크 최경주(46·SK텔레콤)도 동영상을 통해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마이크 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커미셔너는 “박세리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골프 붐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세계 골프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날 대회장에는 1라운드 사상 최다 기록인 5588명의 갤러리가 모여 박세리의 은퇴 라운드에 의미를 더했다. 스카이72GC 측은 박세리의 은퇴 라운드를 기념해 10번홀을 ‘박세리 홀’로 헌정했다.

렉시 톰프슨(미국), 펑산산(중국)과 같은 조에 편성돼 티샷을 한 박세리는 보기 9개, 버디 1개로 8오버파 80타를 쳐 최하위로 자신의 마지막 라운드를 끝마쳤다. 박세리가 골프채를 잡은 것은 지난 7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열린 US여자오픈 이후 석 달 만이다. 그 사이 8월에 열린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 감독으로 활동한 탓에 연습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박세리가 18홀을 도는 동안 팬들은 ‘사랑해요 세리’ ‘대한민국 골프의 전설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등의 글귀가 적힌 빨간 수건을 흔들며 그의 뒤를 끝까지 따랐다. 박세리는 이날 경기가 끝난 뒤 대회 주최 측에 기권을 알려 공식으로 마지막 라운드를 마무리했다.

박세리는 골프가 소수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1998년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세계 골프계를 주름잡는 ‘K골프 돌풍’의 시작을 알렸다. 같은 해 US여자오픈에서는 워터해저드에 맨발로 들어가 샷을 날리는 일명 ‘맨발 샷’ 투혼을 보여주며 대회를 제패해 당시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큰 감동을 줬다. 박세리는 이 대회에 앞서 LPGA 챔피언십을 제패해 LPGA 투어 데뷔 해에 첫승과 두 번째 우승을 모두 메이저대회로 장식한 최초의 선수로 역사에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영종도=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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