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산업리포트] 일본 기업 '나카마즈쿠리' 열풍…나홀로 경영 대신 '연합군' 결성

입력 2016-10-16 17:38  

전략적 제휴로 세계시장 공략하는 일본 산업계

힘 합치는 도요타-스즈키…자율주행 등 기술 공동개발
조선업계도 4개사 제휴 협의

일본 정부, 산업재편법 제정 등 기업 간 공조 적극 지원
전자업계 추락 되풀이 않으려 민관 선제적 대응 한목소리



[ 도쿄=서정환 기자 ] 지난 12일 오후 6시30분 일본 도쿄 고라쿠 도요타자동차 본사 지하 1층 대회의실.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사장과 스즈키 오사무 스즈키자동차 회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두 최고경영자(CEO)는 손을 맞잡고 전격적으로 전략적 제휴를 발표했다. 환경과 안전, 자율주행차 등 차세대 기술 개발에 공동 대응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다. 스즈키 회장이 같은 시즈오카현 엔슈 출신인 도요다 쇼이치로 도요타 명예회장에게 전략적 제휴를 제안한 지 한 달여 만에 이뤄진 것이다. 장남인 도요다 사장은 “한 개 업체가 개별적으로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같은 뜻을 가진 ‘나카마즈쿠리(仲間作り·동료 만들기)’가 중요해졌다”고 제휴 배경을 설명했다.


30년 오토바이 전쟁도 종지부

16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자동차, 조선, 발전 등 일본 산업계에서 전략적 제휴, 경영 통합 등 ‘히노마루(일장기) 연합군’ 결성이 잇따르고 있다.

스즈키 회장은 “품질 좋은 차량을 싸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독립 기업으로 살아남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강해지고 있는 환경 규제와 자율주행 등 분야에서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얘기다.

지난 5일 혼다와 야마하발동기도 소형 스쿠터 생산과 개발에서 제휴하기로 했다. 점점 쪼그라드는 일본 시장을 놓고 출혈 경쟁을 할 게 아니라 세계 시장을 겨냥해 힘을 합치기로 한 것이다. 양사는 1980년대부터 30년 넘게 일본 오토바이 시장을 놓고 이른바 ‘HY전쟁’을 벌여온 터라 업계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히타치제작소와 도시바, 미쓰비시중공업은 내년 봄 원자력발전소용 연료사업 통합을 목표로 지난달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일본 원전 재가동이 늦어지면서 경영 부진에서 탈피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조선업계에선 미쓰비시중공업이 이마바리조선 등 3개사와 상선사업 제휴를 협의 중이다. 미쓰비시가 가진 조선 설계 기술력과 3개사의 건조 능력을 합치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전자업계는 산업혁신기구 주도 연합군

2000년대 한국과의 경쟁에서 밀린 전자업계는 빠르게 연합체제를 구축했다. 르네사스일렉트로닉스는 2003년 히타치와 미쓰비시전기에 이어 2010년 NEC일렉트로닉스의 반도체 부문이 합쳐져 탄생했다. 지난달 미국 반도체기업 인터실을 32억달러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공격 경영에 재시동을 걸었다.

재팬디스플레이는 소니 도시바 히타치의 중소형 액정표시장치(LCD) 사업 통합법인이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연합군으로 지난해 소니 파나소닉 등이 합쳐진 JOLED가 탄생했다. 이들은 정부 주도의 민관펀드인 산업혁신기구가 최대주주다. 최근에는 대만 훙하이그룹으로 넘어간 샤프가 OLED 사업 제휴를 위해 JOLED 주요 주주인 재팬디스플레이에 손을 내밀었다.

차세대 인재 양성과 사이버 방어를 위해서도 뭉쳤다. 도요타 파나소닉 등 8개사는 공동으로 도쿄대에 인공지능(AI) 인력 양성을 위한 기부강좌를 개설했다. 도요타 닛산 혼다 등 자동차회사는 자동차를 표적으로 하는 사이버 공격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사이버 방어망 구축은 자동차가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커넥티드카’ 보급의 선결 과제로 꼽힌다.

日 정부도 제휴·사업재편 유도

일본 기업 간 전략적 제휴 붐이 일고 있는 것은 일본 국내 시장이 줄어드는 가운데 세계 시장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서는 일본 업계 내 제휴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해서다. 자동차 산업만 봐도 지난 100년간 자동차의 유일한 동력원은 엔진이었기 때문에 엔진을 개량해 주행성능을 높이는 것이 성장을 위한 최대 과제였다. 하지만 하이브리드카,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고 자율주행차 개발 경쟁까지 뜨거워지면서 각사의 자체 개발 능력만으론 역부족인 상황에 몰렸다.

일본 정부는 AI, 사물인터넷(IoT) 등 ‘4차 산업혁명’을 위해 민관이 공동 참여하는 미래투자회의를 신설하고 일본 기업 간 공조체제 구축을 유도하고 있다. 구조조정 등 산업 재편을 촉진하는 법도 제정했다. 2014년 시행에 들어간 산업경쟁력 강화법은 기업의 구조조정?생산성 향상과 업계의 공급 과잉 구조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해당 기업에 세제 및 금융 혜택을 준다. 미쓰비시중공업과 히타치제작소의 화력발전 등 전력시스템 사업 통합은 이 법 시행을 계기로 이뤄졌다.

일본 기업들의 제휴 움직임은 일본 국민성과도 관련 있다는 분석이다. 일본식 경영에서 기업 간 경쟁은 기업 내부적으로 원가를 줄이고 제품을 차별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가격 경쟁으로 약자를 문 닫게 하는 ‘치킨게임’을 암묵적으로 금기시한다. 반면 서로 처한 상황이 비슷하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뭉치는 경우가 많다.

기업 지배구조상으로도 제휴하기 쉬운 구조다. 대부분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맡고 있어 소유권에 집착하지 않고 경쟁업체와 손잡을 수 있다. 국중호 요코하마시립대 교수는 “일본은 잃어버린 20년 동안 전자업계의 추락을 지켜보면서 선제 공동 대응하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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