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에는 정치·시장혁명도 필요
지도자들의 올바른 역사인식이 중요
윤종용 < 전 삼성전자 부회장 >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49년 전이다. 1543년 동서양(東西洋)에서 당시로선 대단치 않았지만 엄청난 후폭풍으로 이어진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 유럽에서는 코페르니쿠스(폴란드인)가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 베살리우스(벨기에인)가 《인체의 구조》라는 책을 발간했다. 같은 해 일본에서는 규슈 남단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원이 조총 두 자루를 섬 책임자(島主)에게 전해주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유럽에서 발간된 이 두 권의 책은 과학혁명의 시발점이 됐다. 1687년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로 이어지며 후속적 과학기술 혁신을 낳았다. 일본에 전수된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전국(戰國)시대를 평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도 임진왜란을 일으키는 데 사용했다. 이후 1636년 나가사키에 데지마(出島)라는 인공섬을 세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商館)을 유치해 쇄국정책 아래에서도 200여년간 무역과 동시에 서양 문물 ?받아들이며 근대화를 도모했다. 세계사는 이 시기를 전후로 근대화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인간은 본능인 풍요하고 편안하며 안전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구를 발명하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근대 문명의 시발점이 된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시대는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의 관계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줬다. 포르투갈은 1400년 초 엔히크 왕자를 중심으로 원양항해용 선박과 장비, 항법장치, 나침반, 원양항해기술 등을 연구할 연구소와 항해 학교를 설립해 항해기술과 인력을 체계적으로 개발하고 양성했다. 이것이 대서양 변방의 소국인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고 해양강국이 된 비결이다.
14세기까지만 해도 중국은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에서 서양을 앞섰지만, 15세기 초 시작한 대항해시대의 패권은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대항해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던 영국은 기술과 자본을 축적해 18세기 후반 1차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개량된 증기기관을 활용해 제철과 방직산업을 발전시켰기에 가능했다. 그 후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100여년간 팍스브리태니카(Pax Britanica)를 구가했다.
이 모든 역사가 웅변해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산업과 경제발전을 견인하고, 더 발전된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과학기술의 혁신은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인 사람들이 한다는 것이다. 대항해시대가 절정에 달하던 15세기 말, 세계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바스쿠 다가마,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을 개량해 산업혁명의 불씨를 댕긴 영국의 제임스 와 ??바로 이런 인물들이다. 마찬가지로 과학기술 혁신을 통해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이도 수없이 많다. 1946년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를 개발한 에커트, 1948년 최초의 반도체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 1953년 DNA의 구조를 입증한 크릭과 왓슨 등이다. 이들의 공로는 20세기 후반 역사상 가장 눈부신 3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문제는 이 모든 게 건전한 사회지배구조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점이다. 과학혁명, 기술혁명에 버금가는 정치혁명, 시장혁명, 기업혁명 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가 4차 산업혁명을 말하지만 우리의 사회지배구조를 떠올리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뿌리 깊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사상으로는 닥쳐올 산업혁명에 승리자는커녕 낙오자가 되기 딱 좋다.
지난 100년 동안의 변화는 과거 5000년 동안의 변화보다 더 크고 빨랐다. 그래서 미래는 더욱 예측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앞으로도 과학기술 혁신이 사회 발전을 이끌 원동력이라는 점이다. 혁신을 주도할 호기심 많고 창의적이며 꿈과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인재에 국가의 운명을 걸어야 할 때다. 이 엄중한 시기에 사회의 지도자들, 정책 입안자들,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올바른 역사 인식과 선견력, 통찰력을 갖고 있는가.
윤종용 < 전 삼성전자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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