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건만 파는 시대는 지났다 - GE디지털
[ 주용석/고경봉 기자 ]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은 138년 전통을 가진 제조기업이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 1878년 세운 조명회사가 모태다. 지금도 세계 항공기 엔진 시장의 60%를 장악한 절대 강자다. 이런 GE가 요즘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 중 하나가 됐다. 1년 전 이맘때 세운 GE디지털이 그 중심에 있다.
GE는 지난해 “2020년까지 세계 10대 소프트웨어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 세계 정보기술(IT) 산업 중심지인 실리콘밸리 북부 샌라몬에 GE디지털을 세웠다. GE 내 모든 디지털 역량을 이곳에 모았다. 연간 5억달러(약 5500억원) 이상을 소프트웨어 분야에 투자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만 1만5000명에 달한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 구글(2만3000명)의 65% 정도다.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게 아니다. 실리콘밸리 IT 기업들이 GE디지털 인력을 빼가려 할 정도다.
지난달 29일 GE디지털을 찾았다. 업무 시간이었지만 가발을 쓴 직원들이 한쪽에서 요란스럽게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 회의실 벽면 곳곳에 화이트보드와 펜이 비치돼 있었다. 아이디어가 나오면 즉석에서 메모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협업할 수 있는 구조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같은 IT 기업에 온 느낌이었다. 셀비 아이크맨 GE디지털 홍보담당은 “GE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며 웃었다.
그의 말처럼 GE디지털은 GE 안에서 매우 이질적인 조직이다. GE 브랜드를 빼고 모든 것을 바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문화뿐 아니라 업무 방식도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닮았다. 원래 GE 경영의 핵심은 ‘식스 시그마’다. 불량률을 끌어내려 완벽한 제품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 전략이다. GE가 지난 30여년간 전 세계 기업의 ‘경영 전도사’로 군림한 비결이기도 하다.
GE디지털은 식스 시그마를 버렸다. 대신 스타트업이 구사하는 ‘패스트 웍스(fast works)’를 채택했다. 현안부터 해결해 빠르게 성과를 내고 이후 다음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속도와 소통에 방점을 둔 전략이다.
사무실도 이를 극대화하는 구조다. 회의실 곳곳에 터치 스크린이 설치돼 원격 화상회의를 할 수 있다. 3D(3차원) 프린터도 준비돼 있다. 회로와 어댑터 등 각종 전자부품을 파는 자동판매기도 놓여 있다. 전자부품은 개당 1~5달러 선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석에서 자판기로 전자부품을 뽑아 조립하거나 3D 프린터로 시제품을 만들어 테스트할 수 있다. 그만큼 고객의 요구에 재빨리 대응할 수 있다. 유데이 테너티 디자인담당 책임자는 “과거에는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제품을 개발했지만 지금 ?한 달여 만에 새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업무 방식만 바꾼 게 아니다. GE디지털은 ‘프리딕스(Predix)’라는 핵심 제품을 갖고 있다. 세계 최초의 산업인터넷 운영체제(OS)다. 프리딕스는 PC 시대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 스마트폰 시대 구글의 안드로이드나 애플의 iOS에 비견되는 제품이다.
이유는 이렇다. GE는 항공기 엔진, 발전기 터빈 등에 센서를 달아 판다. 예컨대 항공기 엔진 한 개에 250개의 센서가 달린다. 여기서 데이터를 수집해 실시간으로 고장 여부를 파악한다. GE가 판매한 항공기 엔진 중 60~70%는 고장 나기 전에 원격 수리를 받는다. 유지보수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거대한 항공산업에서 이런 식으로 생산성을 1%만 높여도 약 10조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프리딕스는 여기에 딱 맞는 제품이다.
이미 인텔, IBM, 오라클, 인포시스 등 글로벌 IT 기업 200여곳이 ‘프리딕스 진영’에 합류해 산업인터넷 컨소시엄을 꾸렸다. 그레그 페트로프 GE디지털 최고경험책임자는 “과거에는 물건만 팔았다면 지금은 소비자의 이용 패턴과 경험을 읽고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며 “경험과 솔루션을 팔지 못하는 제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고 말했다.
주용석/샌라몬(미국)=고경봉 기자 hohoboy@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