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세상의 배꼽' 쿠스코 '12각 바위'엔 잉카의 숨결이 고스란히

입력 2016-10-23 16:52  

심영섭의 영화로 떠나는 여행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그곳 페루 쿠스코




황금 도시에 황금은 없었다. 대신 안데스 산맥 위의 양철 지붕이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도착할 때 해발 3600m의 고도를 느끼는 첫 순간은 비행기가 하강할 때다. 항구 도시, 해발 0인 리마에서의 이륙과 달리 쿠스코에서는 채 몇m 하강한 것 같지도 않은데 승무원이 비행기에서 내리라고 한다. 사방이 온통 갈색인 엄청나게 큰 분지. ‘까미노 레알’(국도)이라고 불리던 잉카 길의 중심, 케추아어로 ‘세상의 배꼽’이라 불리운 쿠스코에 도착했다.

오토바이 한 대로 남미 대륙 횡단을 시도했던 두 청년, 23세의 체 게바라와 친구인 알베르토는 1952년 4월2일, 쿠스코에 다다른다. 그들은 걸어서 페루 국경을 넘는데, 너무 피곤해 알베르토의 30세 생일도 축하하지 못하고 아예 흙길에 대자로 누워버린다. “이건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며. 그런데 그들 곁으로 태연히 원주민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속 한 장면. 영화에선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지지 않지만 아마도 체게바라와 알베르토 역시 나처럼 고산병으로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페루에 와서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높이 있다는 것을. 잉카와 스페인, 피지배자와 정복자의 문명이 함께 어우러진 이 도시는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됐고,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1533년 피사로를 필두로 쿠스코를 정복한 스페인인은, 잉카의 터전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곳에 스페인풍의 건축물을 내리 누르듯 세웠다. 그러나 그들도 미처 파괴하거나 뺏어가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잉카의 석벽이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는 체게바라가 원주민 소년인 네스토란을 만나 아르마스광장에서 스페인과 잉카 문명의 차이를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 스페인 사람이 쌓은 석벽이고, 이것은 잉카의 석벽인데, 스페인이 쌓은 석벽은 ‘인카파블’이라 불리운다면서. 페루의 여러 잉카 유적을 돌아다녀 보니 나 역시 금방 구별이 간다. 스페인 사람이 만든 석벽은 전형적인 회벽으로 돌과 돌 사이에 시멘트 같은 회반죽을 넣었지만 잉카인은 그냥 큰 돌을 잘라 레고 조립하듯 빈틈없이 돌을 끼워 맞췄다.

아르마스광장의 동북 방면에 있는 석벽을 이루는 수많은 돌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12각 바위’다. 커다란 돌에 12달을 상징하는 12개의 면을 내고 그 돌을 중심으로 면도날 들어갈 틈 하나 없이 돌들을 쌓았다. 돌을 다루는 잉카인의 놀라운 솜씨에 관광객이 북적인다. 12각 바위를 좌측으로 돌면 뱀이나 퓨마 모양으로 돌을 쌓은 또 다른 석벽을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퓨마로 보이는지 가게 문 위에 표지판을 달아 놓았다. 그 골목을 왼쪽으로 또 돌면 잉카시대 이전, 그러니까 프리 잉카시대에 쌓은 석벽이 나온다. 확실히 잉카시대 석벽과는 달리 돌들도 작고 어떤 돌에는 심지어 조개 화석이 보이기까지 한다.

문득 철을 사용하지 못했던 잉카인들이 어떻게 돌 자르는 기술을 갖게 됐나 궁금했다. 이 궁금증은 아르마스광장 서북쪽에 있는 ‘잉카박물관’에 들러서야 모두 풀렸다. 그들은 히마타이트라고 하는 매우 단단한 돌을 강가에서 주워 단단한 돌칼을 만들거나 (다이아몬드 강도가 10이라면, 히마타이트의 강도는 8) 청동을 사용해 돌을 잘랐다. 그리고 자른 돌은 나무 굴대를 사용해 채석장에서부터 돌을 굴려서 운반한 것이었다.

아르마스 광장 중앙에는 1560년부터 100년 동안 스페인 정복자들이 지은 쿠스코 대성당이 버티고 서 있다. 잉카의 토속신앙을 상징하는 비스코차 신전을 헐고 만든 것으로, 성당 내부로 들어가면 입이 벌어질 정도의 호화로움의 극치를 이룬다. 일명 ‘바로코 안디노(Barroco Andino)’라고 하는 페루 스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성당 내부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수많은 제대와 400여점이 넘는 종교화가 빈틈없이 성당을 채우고 있다. 겉으로는 지배자의 신앙인 가톨릭을 숭상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면면에는 잉카인의 저항과 토속적인 면모가 가미되는 곳이기도 하다.

성모 마리아는 태양신의 황금관을 썼고, 예수상은 이곳 원주민처럼 검은 피부를 지녔다. 검은 예수상은 이곳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그을음으로 검은색이 됐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후로 지진을 막아주는 신으로 숭상되고 있다. 종교화 속의 악인들 그러니까 예수를 팔아먹은 배신자 유다라든가 성인을 핍박하는 로마 군인들은 전부 스페인군으로 묘사된 점도 특이하다.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마르코스 사파타라는 현지 민속 화가가 그린 최후의 만찬 성화였다. 만찬 속 음식은 바로 이곳의 가장 유명한 민속 요리 ‘꾸이’가 아닌가.

최후의 만찬도 본 김에, 저녁은 큰마음을 먹고 기니아 피그 구이인 ‘꾸이’를 먹어보기로 했다. 쿠스코에서 가장 유명한 식당인 ‘파차파파’를 찾아 꾸이를 예약했다. 굽는 데 한 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대성당에서 만난 홍콩인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는데, 마침내 꾸이가 나왔다. 민속주 피스코 사워와 함께 먹은 꾸이의 맛은 닭이나 오리맛에 더 가까웠다. 자그마치 3만5000원이나 되는 가격에 비해 먹을 것은 별로 없다. 아마도 단백질이 부족하던 시대의 영양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밤이 돼서야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은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돌들이 황금빛을 뿜어낸다. 광장의 중심에는 한국의 세종대왕에 해당하는 잉카 군주 파차쿠텍의 동상이 서 있다. 파차쿠텍의 동상에서, 대성당의 벽화 속에서 ‘제국은 사라져도 문명, 잉카는 죽지 않았다’고 외치는 원주민의 목소리를 듣는다. 노란 가로등이 불들인 쿠스코 길거리 야경은 고흐가 살아 있다면 한번 그려보기를 소망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휘황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고산병이 더 심해진다. 심장이 가로막은 흉곽-새장을 뚫고 날아갈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여기 세상의 중심에서 잉카 문명의 절정을 보았으므로.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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