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직장인·노인까지 '분노의 촛불'…광화문이 좁았다

입력 2016-10-30 19:24   수정 2016-10-31 05:03

현장 리포트

시민들 자발적으로 참여
29일 '최순실 촛불' 평화시위…"박근혜 퇴진하라" 2만여명 참여

'콘크리트 朴 지지층' 노인까지
"고향이 영남인데…용서 못해", "이런 나라에 사는 게 부끄럽다"

'촛불 시위' 전국으로 확산
시민단체 매일 촛불집회 개최…학생 이어 교수도 시국선언 준비



[ 황정환 기자 ]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일개 민간인에게 국정이 좌지우지됐다는 건 도저히….”

영남이 고향인 김귀례 씨(71·여)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노인정 친구들과 함께 지난 29일 서울 광화문 일대 촛불 집회를 찾았다고 했다. 현 정권의 ‘비선 실세’로 드러난 최순실 씨(60·최서원으로 개명)의 국정농단 의혹이 짙어지면서 ‘콘크리트 지지층’으로 불리던 노인들도 거리로 나서고 있다.

민중총궐기 투쟁본부가 29일 서울 서린동 청계광장에서 개최한 ‘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촛불 집회엔 10대 청소년부터 7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시민은 2만여명(경찰 추산 1만2000명)에 달했다. ‘투쟁본부’의 지휘 아래 모인 인원은 2000여명에 불과했다.

집회 참가자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직장인 김성민 씨(32)는 “2016년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나중에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고 싶어 나왔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권모군(18)은 “지금 세상은 그동안 배운 정의와 달라 작은 힘이라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했다.

외국인들도 촛불을 밝혔다. 출장 차 한국을 찾았다는 미국인 스티븐 크리스토퍼슨 씨(37)는 “민주국가의 주인은 모든 시민이지 ‘한 명의 시민’이 아니다”며 “한국인들의 열망을 지지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곳곳에서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구호도 들렸다. 참가자들은 최순실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대통령의 책임 있는 해명을 요구했다. 저녁 7시30분께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시위대는 청와대로 행진하다 광화문광장에서 경찰과 충돌하기도 했다. 일부 시민이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지만 대규모 폭력 사태 없이 자정을 넘겨 마무리됐다.

촛불 집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울산에선 주최 측 추산 1000여명이 모여 ‘울산 시민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나와라 최순실, 하야하라 박근혜”라는 구호를 외쳤다. 부산·전주·제주 등 전국 도시들에서도 크고 작은 촛불 집회가 잇따랐다.

외신도 촛불 집회에 주목했다. AP통신은 “최근 열린 반정부 집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라며 “내년 대선을 앞두고 박 대통령의 레임덕(지도력 공백)이 가속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비선 실세 루머와 족벌주의, 부정이득 등이 포함된 드라마틱한 전개의 스캔들이 박 대통령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했다. 아사히신문은 “전국 각지에서 박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리는 등 취임 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고 전했다.

촛불 집회는 이제 시작이라는 예상이 많다. 50여개 시민단체가 모인 민중총궐기 투쟁본부는 다음달 1일부터 매일 저녁 서울 도심에서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 집회를 열기로 했다. 다음달 12일엔 10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민중총궐기 대회’를 열 계획이다.

지난주 대학 총학생회가 주도하는 대학가 시국선언이 잇따른 데 이어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주요 대학교수도 시국선언을 준비 중이다. 50개국 재외동포들은 28일 시국성명서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구글 설문지를 통해 박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는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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