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자괴감 빠진 국민들
'불신사회' 막으려면 대통령부터 나서야…총체적 점검 필요
[ 김봉구 기자 ] 비선 실세 최순실씨(최서원으로 개명·사진)에 대한 분노는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카페에서도, 술집에서도, 최씨가 화제에 올랐다. 대한민국 전체가 나쁜 의미의 ‘최순실 신드롬’을 앓고 있는 셈이다.
이달 1일 서울 신촌의 고깃집에서 동창모임을 가진 40대 후반 정모씨는 “온통 최순실 얘기뿐이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라고 걱정했다. 최씨가 검찰에 출두한 지난달 31일 카페에서 만난 패션브랜드 종사자는 “최순실이 우리 브랜드를 착용하고 있더라. 저런 사람이 우리 브랜드를 사용한다니 그냥 화가 난다”고 말했다.
최순실 사태는 일상 깊숙이 파고들었다. 워킹맘 한모씨(34)는 “설마 했던 게 속속 사실로 드러나니 황당하다. 이러다 무슨 일 터지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전했다. 대학원생 이모씨(35)는 “돌아다니는 ‘최순실 찌라시’를 보다가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털어놨다. 회사원 오모씨(35) 역시 “이게 나라냐. 울화통이 터진다”고 했다.
단지 대중이 언론 보도를 접하고 분노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특정한 사회적 현상(phenomenon)이 되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낳은 국민적 불신으로 인해 사회의 근간인 법과 제도, 규범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같은 사회현상을 해석하는 우선순위 진단명은 음모론이다. 한국사회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급격하게 ‘음모론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명의 책을 저술한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특징은 제기된 음모론 상당수가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라며 “인과율의 위기다. 사회가 합리적으로 움직이며, 밑바탕에 인과관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근대성에 대한 믿음이 깨져나간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해석장애’를 겪는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 배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컨대 공권력이라는 폭력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권위에 대한 믿음’이 있어 허용했는데, 인과율이 흔들리고 해석장애가 발생하면 이런 국가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이 무너진다”고 짚었다.
음모론에 힘이 실리면 사회적 신뢰가 뿌리째 흔들리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순실 게이트는 이전의 권력형 비리와 질적으로 다른 유례없는 사태로 봐야 한다. 입학 비리부터 국정교과서 개입 의혹, 인사 청탁까지 손을 안 뻗친 분야가 없을 정도”라면서 “대중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문제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회적 자산인 신뢰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에 켜켜이 쌓여온 분노가 최순실이라는 촉매를 만나 분출한 것이라는 분석도 뒤따랐다.
“삶이 팍팍하지 않나. 저성장·취업난·양극화 등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어느 하나 뚜렷한 출구가 안 보이는 현실”이라고 규정한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여기에 현 정부 들어 세월호 참사,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으로 누적된 불만이 터져나왔다고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그러나 최순실이 모든 사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선 곤란하다고 경계했다. “이게 다 최순실 때문”이 되면 더 큰 구조적 문제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최순실 개인에 대한 마녀사냥에 그칠 경우 역설적으로 ‘제2, 제3의 최순실’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전문가들은 최순실에 과잉 포커싱하면 ‘사회현상의 개인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전상진 교수는 “문제는 단순화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서 “최순실과 박 대통령뿐 아니라 여당, 검찰 등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간 제대로 문제제기 못한 언론계나 학계도 마찬가지”라고 힘줘 말했다.
전 교수는 “총체적 위기에는 총체적 점검과 처방이 필요하다. 한국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특유의 권위주의적 조직문화를 뜯어고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다만 그 출발점은 박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봤다. 이병훈 교수는 “프라다 구두 사례에서 보듯 최순실이 가십으로 소비되는 측면이 있는데 올바른 방향은 아니다. 감정적 접근보다는 객관적으로 명명백백하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사안”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 지금 이대로라면 한국사회는 ‘불신사회’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ope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