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배우자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업가들이 박정희 정부에 가장 절실하게 요청한 것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였습니다. 국교 정상화가 이뤄져야 한국의 풍부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결합하여 외국 시장에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래야 더 많은 수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한·일 회담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가 청구한 손해배상을 인정하지 않아 회담이 중단되곤 했지요.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을 일본에 보냈습니다. 일본의 외무부 장관인 오히라와 김종필은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에 대한 타협에 성공했습니다. 청구권 문제는 일본이 10년에 걸쳐 한국에 3억달러의 무상 원조와 2억달러의 공공 차관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습니다. 1951년부터 열리기 시작한 한·일 회담은 무려 14년 만에 그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 ?대학생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굴욕 외교라는 것이었지요. 서울에서는 대대적인 군중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1965년 6월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협정에 두 나라 외무부 장관이 사인을 하였지요. 그해 8월 국회의 비준을 얻어 일본과 마침내 정식으로 국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 증대뿐만 아니라 기간 산업을 확충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기간산업이란 다른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는 산업으로 도로, 항만, 정유, 비료, 석유화학, 제철산업 등을 말합니다.
경부고속도로 없이 수출 안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2차 개발 계획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포함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지요. 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은 계획대로 이뤄져 1970년 7월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하루 생활권으로 만들어준 것은 물론, 화물 수송을 원활하게 해주는 한국 경제의 대동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게 되었습니다.
이때 종합 제철소도 지어졌습니다. 제철소를 만드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지요. 제철소는 다른 어떤 기간산업보다 시급했는데 건설 자금과 기술을 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에서 들어올 예정이던 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짓는 데 쓰기로 했습니다. 일본도 이에 동의하고 기술 자문까지 제공했습니다. 덕분에 1970년 4월 포항종합제철소가 착공되었습니다. 1972년 7월 첫 공장을 완성한 포항제철은 이후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 수출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자동차산업도 이 무렵 시작되었습니다. 자동차산업은 기초 소재와 부품 생산은 물론 판매와 애프터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관련 산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산업이 발달하면 고용이 증대되고 산업 구조가 고도화하는 데 큰 힘이 되지요. 1960년대 말 외국에서 부품을 사다가 조립하여 자동차를 만들던 우리나라의 자동차 공장에서는 1970년대 들어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목수와 맞바꾼 달러
한·일 협정이 맺어질 무렵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지요. 우선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서였습니다. 베트남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를 지키던 미군의 일부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경제적인 문제였습니다.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에 따른 비용을 모두 부담했을 뿐 아니라 베트남의 건설과 구호 사업에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모두 한국에서 사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쟁에 참가한 동안 베트남과의 무역을 통해, 또 파견된 군인과 노무자들의 봉급, 기업의 이익을 통해 한국 경제는 거액의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 협정을 맺고 베트남에 파병함으로써 수출에 온 힘을 쏟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우방인 미국과 확고한 유대관계를 이루었지요. 또 일본에서 수입한 원료와 중간재를 국내에서 가공하여 미국으로 수출하였습니다. 이런 국제 시장의 연관 관계는 한국 경제를 고도성장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글=황인희 / 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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