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은 '공짜' 아닌 '인센티브'로 성공…도시로, 공장으로도 새마을운동을 확대했다

입력 2016-11-11 16:35   수정 2016-11-25 16:22

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41)


“새벽종이 울렸네…새 아침이 …”

박정희 대통령의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새마을 운동을 실시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 개발로 재정적 여유가 생기자 1960년대 말부터 농업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농민들로부터 쌀을 사들일 때 그 값을 해마다 올려주는 등의 노력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본격적인 농촌 개발은 1971년 새마을 운동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

이때부터 새마을 운동 노래가 전국의 농촌에 울려 퍼졌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 중에는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강조한 새마을 운동의 중요한 정신은 이 가사처럼 마을 주민이 스스로 마을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에서는 마을 단위로 지원할 때 전년도의 실적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전년도의 실적이 나쁜 마을은 지원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지요. 이에 농촌 마을들은 다른 마을에 뒤지지 않으려 단결하고 자진하여 새마을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73년 정부는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있는지에 따라 전국 3만5000개 마을을 자립 마을, 자조 마을, 기초 마을로 나누었습니다. 기초 마을은 리더십과 공동 사업이 없는 마을이지요. 이 마을들에는 그 등급에 맞게 적합한 사업 과제가 주어지고 이에 따라 정부 지원도 제공되었습니다. 또 기초 마을이 자조 마을로, 자조 마을이 자립 마을로 승격되려면 일전한 요건을 충족해야 했지요. 예를 들자면 마을의 간선 도로가 얼마나 정비되었는지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얼마나 잘 댈 수 있는지, 지붕과 담장이 얼마나 깨끗하게 개량되었는지 등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등급이 나뉘고 승급 기준이 정해지자 전국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불길이 들불처럼 퍼져갔습니다. 마을 사이에 경쟁심이 자극된 것이지요.

전근대적 정신을 버리자

새마을 운동의 기본 정신은 근면 자조 협동입니다. 새마을 운동은 어찌 보면 단순하게 농촌을 잘 살게 하자는 경제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나아가 전 국민이 근면 자조 협동하는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바꾸어나가는 정신 개조 운동이었습니다. 마을이라는 사업체가 새마을 정신으로 단결하여 뭔가 건설적인 방향으로 삶을 전개해나가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으니까요.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에서 성공을 거둔 새마을 운동을 도시로, 공장으로 확대해나갔습니다. 그는, 이미 1961년에 “나라의 부패와 구악을 없애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 정기를 바로 잡는다”라는 혁명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이 혁명 공약에 기초한 정신 운동이었습니다. 그 후 박정희 정부의 유신 개헌 등에 반발하고 저항했던 사람들도 이 새마을 운동에는 공감하고 적극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은 당시의 경제 성장 못지않은 커다란 성과를 남겼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전국 3만5000개 마을 중 97%가 자립 마을로 승격했고 기초 마을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농촌의 생활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던 것이지요. 또 1970년 전기가 들어오던 마을은 전체의 20%에 지나지 않았는데 1978년에는 98%나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농촌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전체가 고도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덕분에 국민들의 삶의 질도 크게 개선되었지요. 1961년 82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87년 3,218달러로 증가했습니다. 건강 상태도 좋아져서 1960년 52.4세이던 평균 수명은 1987년 70세로 길어졌습니다. 우리 국민이 오랜 굶주림과 질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지요.


급속한 공업화가 만든 문제도

그러나 밝은 곳이 있으면 그 그늘도 있게 마련입니다. 산업화와 공업화를 급속하게 추진하는 과정에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고 노동자 계층은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1970년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은 노동청과 서울시에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묵살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며 온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습니다. 전태일이 사망에 이르기 전 외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라는 구호는 이후 노동 환경이 개선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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