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관료들이 주인공으로 알려진 ‘한강의 기적’도 근원을 추적해 보면 진짜 주인공은 기업가들이다. 또 한국의 진로를 결정한 외자도입형 공업화 전략, 보세가공무역, 중화학공업, 수출제일주의, 울산공업단지, 수출자유지역, 종합상사제도 등도 기업가들이 제안해 채택된 작품들이다. 기업가들이 여론과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여 국가적인 성장동력을 창출한 사례도 부지기수다.”
김용삼 씨가 쓴 《한강의 기적과 기업가정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한국의 지난 고도성장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꼭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대통령, 관료 등 정부 주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맞는 것인가. 김용삼 씨의 관찰과 회고는 흔히들 알고 있는 과거에 대한 해석에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설령 그런 해석이 한때의 특정한 정치·경제 상황과 일부 맞아떨어졌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지금의 환경은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사회가 갑자기 과거 신념체계로 확 돌아가면 어찌 되겠나. 온갖 비정상의 괴물이 설쳐댈 게 뻔하다. ‘고장난 신념(dysfunctional beliefs)’의 경직성이란 그래서 무섭다.
줄줄이 불려가는 기업인들
정권마다 포스코, KT를 무슨 전리품으로 여기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다. 정부 지분 하나 없는 민영화 기업이 되면 뭐하나. 과거 신념에 사로잡힌 권력자는 여전히 정부 기업이라는데. 그때마다 해당 기업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확실한 주인을 찾으라는 말도 못하겠다. 주인이 멀쩡히 있는 민간기업조차 권력자 앞에서는 무력한 판국 아닌가. 혹여 이 땅의 권력자는 모든 기업을 자기가 만들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그렇지 않고서야 창조경제다 문화융성이다 정부가 마땅히 세금으로 해야 할 공적사업조차 어떻게 기업더러 돈을 내라고 했겠나. 권력자가 사고를 칠 때마다 기업인이 줄줄이 불려다니는 마당이다. 이러니 사이비 시장경제라고 할 수밖에.
마리아나 마추카토는 《기업가형 국가》에서 국가의 역할론이 ‘시장실패→시스템실패→불모지 개척’ 등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진짜 혁신국가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유달리 화려한 구호에 집착하는 이 땅의 국가는 그 반대다. 정부실패를 초래하고,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정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온상을 개척한다. 진짜 기업가는 설 땅이 없다.
차라리 '망각'이 낫겠다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조목조목 파헤친 조지 길더는 역시 예리했다. “권력자는 정부의 권력과 간섭을 축소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기적 통념을 지니고 있다”는데 우리가 딱 그 짝이다. 창조의 본질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돌발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고, 그래서 지식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업가에게 자본이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권력이 기업가에게 돌아가야 할 자본을 빼앗고 지식을 짓뭉개는 사회가 번영할 리 없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창조적 학습사회’로 갈 것을 권한다. 경제는 디지털로 질주하는데 1960~1970년대 신념, 그것도 고장난 신념이 강한 지속성을 갖는 허구적 평형 상태에 갇힌 사회가 높은 학습사회로 갈 수 있겠나. 차라리 과거에 대한 ‘망각(forgetting)’이 백배 낫겠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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